안병욱이라는 분. 대학 교수였던 모양인데 1920년생이면 지금 연세가 얼마야?
올해가 2023년이니 벌써 100세가 훨씬 넘은 어른이다. 지금 그분의 수필집을 읽고 있다. 제목은 ’길(道)이다. 2005년에 출간된 책이다. 그래서 그렇게 참담할 정도로 낡지는 않았다.
책이란 정말 신기한 존재다. 벌써 돌아가신 지가 오래일 분의 육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이런 분의 이런 책이 내가 헌책방을 찾아다니는 맛이었다. 그때 한집 한집을 순례하듯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내가 이런 책을 가지거나 보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여러 권 가지고 있다. 낡아서 이젠 종이가 바스러질 것 같은 상태다. 특별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아는 게 없어서 그냥 책꽂이에 꽂아 놓고 있을 뿐이다.
선생님하고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직전의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우리 학교(전남 해남의 해남 중고등학교)의 본관 건물에 불이 났었다. 학교와 가까운 우리 집에서 버얼겋게 타오르는 이 층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기억이 있다. 본관은 어떻게 손 쓸 수 없어 몽땅 다 타버렸다.
그 직후에 함석헌 선생님께서 위로차 우리 학교를 방문하셨다. 겨울바람이 차가운 운동장에 중고등 전교생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내 기억으로는 오랑캐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어려서 말씀의 참뜻은 알아듣지 못했다.
내 기억에 남는 것은 그분의 특별한 외모였다. 하얀 머리, 하얀 수염, 하얀 한복 두루마기에 흰 고무신을 신으셨던 것 같다. 찬바람 휘날리는 운동장 연대에 서서 두루마기 자락 여며가며 말씀하시던 그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젠 내가 그 나이가 된 것 같다. 나도 온통 하얀 머리가 되었지만, 그분의 뒤에 감히 설 수는 없다.
그런 분을 먼발치에서라도 뵐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드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