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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진채 Nov 13. 2023

서산에 해 꼴깍 넘어간 후

한집에 두 노인이 살면 두 분 다 오래 사신다는 통계가 나왔다 한다. 노인 부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같은 성별의 노인 두 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커플은, 금방 돌아가실 것처럼 아프던 분들이 그럭저럭 잘 연명하신다는 것이다. 

내세우는 이유가 좀 황당하다. 둘이 서로에게 먼저 죽으라고 미룬다는 거다. 사양인지 아님, 서로 처절한 기원인지는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다. 과연 그게 의학적으로 검증된 주장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그냥 생각 없이 내뱉은 그런 시중에 떠도는 낭설일 수도 있겠다.  

   

“저놈의 웬수가 낳은 새끼 아니랄까 봐, 꼭 웬수처럼 꼴에 꼴값하고 있으니, 내 원 참”

아들이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들면 혀를 끌끌 차며 하는 한탄이다. 

누구? 물론 연세 드신 어머니의 푸념인 거다. ‘웬수’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닌 자신의 영감을 이르는 말씀이다. 아들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드는데 이미 고인이 된 영감을 소환하는 심정은 또 뭔가? 어쩜 알 것 같았는데 데 다시 생각하니 모르겠다.    

 

가만,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다. 아니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내 할멈의 이야기일 수가 있겠다. 관례에 따라 내가 먼저 갈 것이고, 내 할멈이 안 사돈을 만나 같이 남은 생을 부대끼며 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은 어떤 식이든 우리 윗대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내 할머니나 어머니의 삶이었고, 나중에 생각하는 이야기는 내 아내나 자식의 탄식일 수도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 

나는, 아니 우리 남자들은 자금까지의 예로 보면 안사람보다 먼저 가는 것이니 크게 마음 쓸 일이 아니겠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속이 아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걸 어째, 진시황제도 넘지 못한 벽이니 말이다.      


오늘 저녁에는 집에 들어가면서 할멈이 좋아하는 ‘꿀떡’을 한 봉지 사 들고 갈 생각이다. 아주 선량한 나더러 먼저 가버렸다는 죄목만으로, ‘웬수’라고 부르지는 말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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