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노래
죽는다고 생각할 때 신나고 기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더라도 끝까지 죽지 않겠다고 몽니를 부리는 사람의 고집 또한 통할 리가 없다.
가장 삶에 대해서 어리석었던 사람은 불로초를 구하러 사람을 멀리까지 보낸 진시황제가 아니었던가 싶다. 가만 한번 생각해 보자. 그때 만약에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그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1,000 살 단위로 나이를 먹은 할아버지라니. 생각하면 으스스한 일이다.
나는 평소 곱게 늙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여겼다.
그 곱게 늙는다는 것 중에는 죽음을 깔끔하게 수용하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건 내가 생에 대한 미련을 툴툴 털어버릴 정도로 인격이 완성되었다기보다는 되고 안 되고를 판단하는 분별력 정도는 가졌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죽을 때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요즘 내가 깊게 생각하는 부분은 재화야 어차피 가져갈 수 없고, 문제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직간접적으로 맺은 인연은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점이다.
죽을 사람이 별 희한한 생각도 하고 있다 하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건 그게 아니다. 죽음이 서로의 관계를 단절시킬 때, 죽음 그 직전까지의 관계를 어떻게 조정하느냐 하는 문제다.
나는 요즘 우리가 흔히 ‘지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하고의 관계를 서서히 마감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특히 나보다 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필요 이상으로 거리를 좁히는 것을 조심하고 있다. 예전에는 서로 돕고 의지하던 사이였지만 이제 내가 늙고 힘이 없어지면 그들에게 도움을 받는 체제로 바뀌게 된다.
그게 싫다.
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 왔던가 하고는 상관없이 내가 그들에게 보여야 할 마지막 기억은 지금보다 더 흐트러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며칠 전에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새해가 되었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만나서 식사라도 하자고. 나는 완곡하게 사양했다. 다른 뜻은 없다. 내가 그 사람에게 남겨줄 수 있는 기억은 지금, 딱 지금의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만약에 어떤 젊은 사람과 인과관계를 계속한다면 그때는 딱 한 가지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그냥 갈 것인지, 아니면 지우고 갈 것지’이다.
내가 그 사람을 이제부터 만나지 않으면 내 이미지는 그냥 갈 것이고, 내가 그 사람을 계속 만나면 내 얼굴에 깊이 팬 주름살이며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게 될 터이니 그나마 남아 있는 지금의 내 성한 모습을 지워 버리는 것이다.
내가 30대 후반일 때 나보다 네 살 많은 선배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 선배는 내가 노인이 된 지금도 40대 초반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아름다운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