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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징후도 느끼기 전에 기운부터 빠지는 사람

- 노인의 노래 -

by 임진채

여명의 징후마저 느끼기 어려운 신 새벽, 불 켜고 방 안에 앉아 있으니 창을 뚫고 들어오는 오는 냉기가 보이는 것 같다. 이제 겨울의 끝자락인데도 살갗을 찌를 것 같이 느껴지는 차가움은 각별하다. 새카만 어둠 속에 넓은 팔 간격으로 두dj 개 켜진 앞 아파트의 불빛이 창백하게 얼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봐서 춥긴 추운 모양이다. 요즘은 쉬 피곤해져서 저녁을 먹자마자 눕는데 이렇게 어중간한 시간에 눈이 떠지곤 한다. 잠이 준 건 아니고 단지 자는 시간만 이동한 것이다.


이 시간에 일어나면 할 짓이 영 마땅치 않다. 케이블 TV 항상 기다리고 있겠지만, 종일 일하고서도 또 늦은 밤까지 마시다 조금 전에 들어왔을 막내와 유난히 잠귀가 밝은 아내에게 미안하여 선뜻 리모컨에 손이 가지 않는다. 다시 누어도 잠은 안 올 거고, 아내 때문에 불을 켜고 책을 뒤적일 수도 없는 이 시간은 참 난감한 시간이 맞다.


얼마 전에 친구 딸 결혼식에 다녀왔다. 그러고 싶어 그럴 리는 없었겠지만 하필이면 예식 시간이 오후 3시였다. 역삼동 이면 수월찮은 거리여서 점심은 거른 채 출발했다. 호텔에서 치르는 결혼식인데 자리에 앉으니 테이블에는 이미 기본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대강 집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안 보였고 더욱이 숟가락이나 젓가락도 없었다. 주린 배를 안고 그림의 떡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혼사를 축하하는 마음보다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들만 편하겠다고 음식의 일부를 차려놓고 미리 먹지 못하게 숟가락을 치워버리는 행동거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용자를 얕보는 짓이다. 남의 좋은 날에 된소리를 내기도 그래서 뒤틀리는 속을 안고 앉아있으려니 연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날이 주말이어서 돌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자리가 없는 지하철에서 내 키엔 좀 높은 손잡이에 매달려 서 있는데 앞에 앉은 아가씨가 나를 몇 번 올려다보더니 여기 앉으세요 하면서 일어선다.

화장을 많이 하는 얼굴같이 보였고 목소리가 갈라진 듯 탁한 거로 봐서 창(唱)을 하는 아가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을 수 있는 일도 아니어서 별생각 없이 비켜주는 자리에 앉았다.

한데 그 아가씨는 몇 정거장이 지났는데도 내리지 않는다. 그때서야 일부러 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다음에 내리려나 보다 하고 변변히 고마움도 표하지 않은 채 털썩 주저앉았었다. 한참이나 지나서 새삼스레 고맙다고 인사할 수도 없고 해서 가만히 앉아 있는데 내가 참 염치없는 영감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매번 자리를 양보 받을 때마다 느끼는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하는 당혹감에 우울해지는 뭐 그런 느낌이 또 느껴졌다. 어떤 양상이든 내 노쇠를 확인하는 것이 달갑지 않다는 그런 느낌은 세월에 비례해서 점점 더 또렷해진다. 방법이 있다면 나이 같은 것은 안 먹었으면 좋겠다.


일부러 시계를 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날이 밝으려면 한참은 더 지나야 할 것 같다. 24시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지만 거실 탁자 위의 무선 공유기에서 번쩍거리는 점멸등 외에 사위는 완벽하게 어둠에 잠겨있다. 베란다로 향하는 창에는 두꺼운 커튼을 쳐서 앞 아파트의 뜬금없는 불빛마저 스며들지 못한다.

상체를 몇 번 비틀고 허리 굽혀 펴기를 서너 번 하다 보니 멋쩍은 생각이 든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체조하는 형국이니 내가 꼭 망령이 들어 흰수작하는 파 파 노인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은 떴으나 사방은 어둡고, 늙었다지만 그렇다고 아주 완벽하게 늙어 허리가 꼬부라진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노인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할 일도, 나 아니면 안 될 일이 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일상을 맞고 또 보내기가 늘 이렇게 버겁다.

이 길고 무료한 내 하루를 어쩌나!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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