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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착하면
안 되나?

- 너무 큰 소망 -

by 임진채


나는 밖에서는 안 그렇지만 집에서 밥 먹을 때는 한 그릇을 다 먹는 경우가 거의 없다. 공기에 담긴 밥에서 항상 얼마를 남긴다. 따라서 나하고 40년을 같이 해서 나는 아예 그걸 고려해서 조금 더 밥을 담는 것 같다.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심정은 이해한다는 뜻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생존에 계실 때 집에 종종 손님이 찾아오곤 했다. 식사 때가 되면 어머니는 손님과 할아버지 밥은 항상 고봉으로 담았다. 나는 막내였기에 할아버지하고 같은 상에서 밥을 먹는데 내 밥은 평소와 같이 꼭 누르면 한 숟갈밖에 안 되게 느껴지는 양이다. 나는 그걸 단숨에 먹어 버리고는 차마 일어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리고는 민망하게도 손님이 진지를 드시는 것을 빨리 빤히 보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개의 손님은 밥을 남기는 경우가 없다. 마지막 한 숟갈을 입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미련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음이라니.


평소에 식구들끼리 밥 먹을 때는, 할아버지는 막내 손자인 내 얼굴을 그윽이 살피다 두어 숟갈 남은 밥그릇을 슬며시 내 앞으로 밀어 주시곤 했다. 어쩌다 할아버지도 시장해서 그릇을 다 비워 버리면 그때는 마지못해 울고 싶은 심정으로 일어서서 방을 나온다.


그런 모습은 지금에 와서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는 그건 아주 흔한 풍경이어서 영화에도 나올 일이 아니었다.

또 한 가지 영화에도 이젠 안 나오는 컷 중의 하나가,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안주인이 남기지 말고 다 드시라고 먹고 있는 밥에다 물을 부어 버리는 모습이다. 이 얼마나 통렬하게 가슴을 찢는 모습인가.

남기는 게 도리였고, 남기지 말고 다 드시라고 물을 붓는 그 마음 밑바닥에 깔린 통곡 하고 싶도록 깊은 고랑이 된 그 ‘가난’ 말이다.


작심한 것은 아닌데 아이들이 생기면서부터 나도 밥을 조금씩 남기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어렸을 때처럼 행여나 하는 시선으로 내 밥그릇을 넘어 다 보는 애들이 없었는데도 나는 밥을 꼭 남겼다.

최근에는 손녀에게 밥을 딱 한 숟갈만 더 먹으면 할아버지가 예쁜 인형을 사 주겠다고 약속을 하는 형편인데도 나는 아직도 내 밥그릇을 다 비워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건 청승인지 아니면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지 말자는 다짐인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게 청승일지라도, 나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걸식 아동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반성 말이다.


며칠 전에 TV에 5,000원짜리 한 장 꼬깃꼬깃 들고 와서 내 동생에게 이 돈 만큼만 통닭을 먹게 해줄 수 없겠냐고 통사정했다는 17살 형의 이야기를 통닭집 주인이 하는 것을 봤다.

이 엄혹한 코로나 상황에서 주인은 자기도 문 닫아야 할 입장이지만 그 아이에게 통닭을 먹여 줬고,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오라고 했는데 그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더라는 그 말이 가슴을 찢는 것 같았다.

배가 고파도 염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17살짜리가 보낸 손 편지를 읽으며 통닭집 주인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런 미담은 왜 없는 사람들한테서 만 보고 들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그 얼마 전에는 어느 사업가가 자기 재산의 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발표도 있었다.

그 액수 5천만 원이 아니라 무려 5조 정도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불법 유통하든 마스크 제조업자에게서 압수한 마스크를 자기 부인이 경영하는 약국으로 보냈다는 경찰서장도 있다.

경찰서장보다 더 높은 사람 중에는 그보다 더 질이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게 이 세상의 다양성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런데도 마음이 편치 않다.


내일이면 3월이고 그러면 바로 봄인데, 그 봄에는 대한민국의 어디에도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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