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의 노래 -
심하게 몸부림치다 잠에서 깼다. 요즘은 이리 두서도 없는 꿈에 시달리곤 한다. 그딴 꿈은 눈을 뜨는 순간, 꺼지는 모니터의 잔상처럼 스르르 사라지기에 단 한 컷도 선명치 않다. 그런데도 꿈이 지나간 자국은 묵직하면서도 은근하게 한참을 징징거리며 머릿속을 휘감는다.
오늘 이 새벽은 해석도 안 되는 난해한 꿈 때문이 아니라 아랫도리, 특히 발이 시려서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그래도 잠에 대한 미련이 남아 눈은 감은 채로 발을 움직여 덮을 거리를 찾았으나 발에 걸리는 게 없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밑을 내려다본다. 이불은 침대 밑에 구겨진 채 떨어져 있다. 머리맡에 자명종이 있을 건대 그건 보이지도 않는다.
사방은 여전히 어둡지만, 지금이 새벽이 아닌 밤중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느낌이 그렇다.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일어나 이불을 끌어 올려 덮고 다시 누웠지만, 다시 잠이 올 리가 없다.
나이를 먹으면 예전하고 똑같은 일도 어느새 긍정보다는 즉시 포기가 따르는 부정으로 보인다.
가을만 해도 그렇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을 때나 가슴이 뜨거웠던 때에는 가을은 풍요와 결실의 계절이었다. 붉게 물든 단풍은 극진한 아름다움이었고 낙엽이 되어 뒹구는 잎사귀들은 다음 해를 대비하는 갈무리였다.
그러나 솟아오르는 흰머리를 새치라고 우기기가 만망해질 무렵부터는 가을이 꼭 그렇게 환상적인 결실의 계절만은 아니게 보였다. 누렇게 익어 고개 숙인 곡식들은 결실이 아니라 드디어 삶의 종점에 이르렀다고 하는 비감이었다. 굽은 허리를 펴지 않고 쉴 짬 없이 쏘다니며 보이는 족족 자루에 집어넣어 대처에 있는 새끼들 몫 지어 올망졸망 쟁여놓는 노인의 소박한 애정도 차마 버리지 못한 하찮은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섶처럼 말라 서걱거리는 줄기와 그 줄기에 붙은 채 말라버린 잎사귀는 다시 태어나기 위한 관리가 아니라 영원히 스러지는, 환생이 불가한 소멸로 느껴진다. 아름다움은 줄고 가슴 저미는 서러움 같은 아쉬움은 는다.
잔 듯 만 듯 혼미한 아침을 맞은 몸과 마음은 여전히 나른하고 뻐근하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 따뜻한 방바닥이라면 등 구부리고 누워 못 채운 잠을 벌충하련만 시멘트로 범벅이 된 아파트라는 공간에서는 누릴 수 없는 안녕이라 하겠다.
망설이다가 나간 사무실의 공기는 다시 나오고 싶을 만큼 차갑다. 날 선 긴장과 아무것하고도 어우를 수 없을 것 같은 황량함으로 섬뜩하다.
당겨 앉은 의자도 어제 내 등을 받쳐주던 그 의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컴퓨터에 전원을 넣자 마치 얼었다 깨지는 얼음처럼 찌지직 찌익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을 낸다.
물을 끓여 뜨거운 커피를 마셔도 한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나, 왜 이러지?
나는 지금 혼돈(混沌)에 빠진 게 분명하다. 아는 게 급속히 줄어든다.
나! 나는 나를 모르겠는데 혹시 나를 아세요?
나는 지금 거세(去勢)되고 있는 과정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