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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계절

- 노인의 노래 -

by 임진채

푸른 잎들이 아직 정정한 나무 밑에 시나브로 쌓인 낙엽이 제법 여러 개다. 붉게 물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요절함이 분명하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천수와 요절의 시간적 차이는 종이 한 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저승과 이승이니 그 거리를 함부로 짐작할 일이 아님이 분명하다.



흔들어 깨우는 듯해서 눈을 뜨니 날 선 형광등 빛이 눈을 찌른다. 잠시 멍했지만 이내 상황이 느껴진다. 이대 목동병원의 장례식장에서 문상객들 접대하는 식탁 사이에 방석 두 개 깔고 또 방석 두 개 포개서 베개 삼아 금방 누운 것 같은데 벌써 깨운다. 넥타이를 맨 채로 양복 윗도리를 덮고 누운 옹색한 잠자리였다.


녹번동 손위 동서가 돌아가셔서 문상을 와서 밤새웠다. 신장암으로 상당 기간을 투병하셨고 올해 칠십사 세니 가슴을 치며 애통해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유족의 심경은 비통할 수밖에 없다. 특히 당사자께서는 가까이 다가서는 마감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어 하셨다. 상태가 좋지 않아서 중환자실로 모셨다는 처조카의 연락을 받고 부산에 계신 형제들이 살아생전에 얼굴이라도 보자고 모두 다 올라왔었다. 그때 나를 알아보겠냐고 물었더니,

“임 서방 아이가. 자네, 내 부탁 한 번만 들어주소. 내가 지금 납치되어 왔다 아이가. 자네가 힘 좀 써서 나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좀 해주소, 아니면 우리 아들에게 내가 여기 납치되어 있다고 연락을 해 주던지.... 그러면 내 그 은혜 절대 잊지 않을 것이네!"

절절히 배어있는 직면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애절함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던 것이 불과 보름 전이었다.



아직 어두운 다섯 시 반에 발인제를 지낸다. 벽제화장터에 일곱 시 예약이라고 서두른다.

여명의 벽제화장터 주차장에는 떠나는 자를 수행하는 많은 차들이 도열해 있다. 겨우 몇 분의 떠남을 기리기 위해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숙연한 표정으로 그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死)의 의미를 숙고할 여유는 없어도 현실적인 이별은 충분하게 느끼고 있는 표정들이다. 남아 있는 생과, 마감하여 겨우 남은 육신마저 정리하여 아주 확실하게 구분하는 갈림길, 그 자리에 살아남은 자들의 표정은 아직도 황망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2라는 표찰이 붙은 방 앞에 관을 넣고 문을 닫는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문 옆에 여러 개 붙어있는 등에 파란 불이 몇 개가 들어온다. 아직 웅성거리고 서성이는 유족에게 상조회사 직원은 타고 온 버스에 승차해 달라고 당부한다.

유족과 문상객을 태운 버스는 일단 벽제를 나와 한참을 가다가 어느 식당 앞에 차를 세운다. 화장이 끝나려면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하니 우선 시장기를 때우라는 것이다.

망자(亡者)를 1,000도가 넘는다는 불 속에 밀어 넣어놓고 그 육신이 소실되는 시간에 살아남은 자들에게 주린 배를 채우라는 직원의 말에 모두 아연한 표정들이었지만 누구 한 사람 이의를 말하진 않는다.


내 앞에 놓인 설렁탕을 몇 숟갈 떠먹다가 소주를 한 병 청했다.

죽음을 처음 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맨정신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거푸 석 잔을 마시고 나니 코끝이 싸하고 맹해지더니 콧물이 주르르 흐르고 갑자기 재채기가 나온다. 준비 덜 된 노숙자 같은 잠자리에 감기가 든 모양이다.

‘에~ 최!!' 하고 나니 눈에서 빗방울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이건 설워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다. 손위 동서의 죽음에 내가 꼭 울어야 할 이유는 없는 일 아닌가. 아니다. 나는 정말 서러워하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죽음의 반경에 하릴없이 포함되어버린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살아온 흔적을 지우고 있는 동안 내 지인들이 소금으로 간을 맞춘 설렁탕을 일상적인 식사인 양 먹을 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삶의 끝이 허망하다기보다는 희극적으로 느껴지면서도 더 깊은 슬픔에 가슴을 저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경기도인데도 강원도에 가까운 양평의 수목장까지 가는 내내 나는 재채기를 하며,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나중에는 그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버려뒀다.

들판에 누런 벼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풍요로 비치지 않은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를 생각하면서, 떠나는 계절을 그냥 보내기만 하는 데도 내 설움은 관리되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인지........


201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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