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때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며칠 후에 선생님이 칠판에 뭔가를 빼곡하게 적더니 지금부터 이걸 다 외우라고 했다.
제목이 혁명(?) 공약이었다. 무척 길었고 어려운 말이 많았다. 다 외운 사람만 집에 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에 한글을 깨우쳤지만, 그 3학년부터 우등상을 탔던 아이였다. 물론 4학년 때도 우등상을 타고 5학년이 된, 공부 좀 한다는 아이였다.
그때 나는 그 공약을 가벼운 마음으로 외우기 시작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도전했다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남은 반 아이는 점점 줄어들었다. 내가 그 관문을 통과하고 정신 차리니 반에서 아예 공부를 포기한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따지면 반백 년도 더 넘게 지난 이야긴데 나는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다. 무너진 자신을 확인하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뼈를 깎이는 아픔이었다는 뜻이다. 그날 서산에 걸린 해가 정말 쓸쓸해 보였다. 작지만 깊은 충격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낮이 자꾸 길어져 가는 봄날 오후 국어 시간이었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손을 들고 선생님께 질문했다.
“선생님, 기아선상(飢餓線上)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할 때의 ‘기아’라는 말을 한문으로는 어떻게 쓰지요?”
(오래된 이야기니 잘 모르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문장은 박정희 소장이 쿠테타를 일으킬 때 내건 공약 중의 하나이다. 나는 그것을 초등학교 때 잘 외우지 못했던 아픈 기억의 문장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정말 놀라신 것 같았다. 나를 한참 쏘아보시더니 설명하던 것을 마저 하시고 내 질문에는 대답을 안 하고 수업을 끝냈다.
다음 국어 시간에 선생님은 수업 전에 칠판에 커다랗게 飢餓라고 써 놓고,
“8번 임진채, 이게 맞는 거야?” 하셨다. 내 번호가 8번이고 신입생이어서 아직은 생소할 내 이름까지 알아보고 오신 것이다.
그 뒤로?
좀 괴로웠었다.
간단하게 괴로웠다고 적었지만, 그 안에 숨은 회한(悔恨)이 많았다.
그 시절은 당연히 군사부일체였고, 말을 안 듣는 아이들은 거칠게 다뤄도 흠이 안 되었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내 행동은 도발이 분명했다. 그날 수업은 쿠테타 공약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그런 경우를 일반적으로는 “맞아도 싸,” 혹은 “매를 벌어요. 매를·····.”이라고 표현한다. 쩝.
나는 선생님을 골탕 먹일 생각이 아니라 그 순간 정말 배고 고팠었다. 한창 먹어야 할 나이에 하루에 두 끼, 운이 없는 날은 고작 한 끼로 연명해야 하는 내 처지에서는 기아(飢餓)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5, 16이라는 시대 배경 말고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나는 그 두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고 무슨 의미 있는 뜻으로 엮고 싶어 한다.
글을 좀 편하게 써야지 하는 순간 이 두 이야기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 두 가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일까?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관심은 그 이야기 이면에 꼭 있어야 할 것 같은 연관성에 있다.
상당 시간을 생각했지만 잡을만한 끈을 찾을 수 없다.
아주 오래전에 읽은 단편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제목만 떠오른다.
겨우 발가락이라니·····.
이건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하거나 전문가에게 물어야 할 일이다. 조금 더 유식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