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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린 것을,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by 임진채

시대마다 그 시대를 말해주는 그림이 있다. 물론 그 그림을 고르고 또 설명하는 것은 각자의 각(角)과 시야(視野)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보이거나 경험한 만큼 말한다는 뜻이다.

내 시선의 높이와 각에 자격지심이 있다는 고백을 먼저 하고 글을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학교에 일찍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는 거의 다 늦은 나이에 입학하는 것이 보통이어서 나는 같은 학년에 나이 차이가 많은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나이에 비해 몸이 작았고 병약했다. 그런데도 나는 호적에는 다른 아이보다 더 늦었다. 사촌 형이 있는데 석 달 먼저 태어났다. 그러나 호적에는 나는 한 살이 더 어린 것으로 되어 있다.

나중에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애를 낳았는데, 살아서 클 것 같지 않더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죽을 것 같아서 일 년 동안 출생신고를 안 한 것이다. 자라면서도 계속 병치레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갑이지만 석 달 형인 사촌이 내 2년 후배다. 세 살, 또는 많게는 네 살이나 많은 동창이 흔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몇 살에 학교에 입학했단 말인가!

내가 자란 시대를 그리자면 온통 ‘기합(氣合)’과 ‘매’였다. 그것도 ‘단체’라는 말이 항상 붙는 그런 식이다. 기합도 단체였고 매도 당연히 단체였다. 자기 잘못만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도 연대하는 그런 구조였다. 본인은 잘못이 없는데 같은 조직, 그러니까 같은 분단이거나 같은 반이라면 함께 기합받거나 매를 맞아야 했다는 말이다.

엎드려서 같은 양의 매를 맞는데 세 살이나 어린애가 감당하는 고통이 같을 수는 없다. 정말 많이 울었다.

내가 제일 힘에 겨웠던 벌은 선착순(先着順)이다.

그 시절에는 한 반이 거의 칠십 명이었다. 선생님이, “저쪽 골대를 돌아오는데 선착순 열 명”하면 나 같이 어린놈은 거의 칠십 등이다. 선착순 열 명을 제하고 다시 뛰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없어진다.


날마다 엉덩이, 종아리, 손바닥에 멍이 든 막내 손자를 보신 할머니는 “이 어린 것을·····.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하시며 혀를 찼다.

그런 교육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따져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금까지 남아 있는 어떤 조직에서는 아직도 그 잔재를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지 않은가 짐작할 뿐이다. 그들은 무슨 동일체라던가 하는 전근대적인 것을 신줏단지로 모시는 것 말이다.

다른 면으로 분명한 것은 나는 친구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이를 먹었을 때, 그때 동창을 만나면 나는 서먹해진다. 상대는 같은 동창이니 말을 편하게 하라지만 내 형보다 나이가 많은 동창이 학교에 다닐 때처럼 허물없을 수가 없다.

같은 고향이더라도 같은 학교를 안 다닌 경우가 있다. 사회에서 만나서 통성명하고 내가 그 동네 누구하고 동창인데 하면 같은 나이인데도 아이고 선배님 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나이니 서로 친구로 지내자고 해도 그때 교육이 몸이 밴 우리는 습관적으로 편안할 수 없다. 만나서 마음이 편치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다.


어제 아주 오랜만에 인천에서 사는 깨복쟁이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이는 같은데 초등학교는 2년 중학교는 3년 후배다. 물론 같은 동네에서 자랐기에 그런 건 전혀 의식하지 않은 친구다.

어제도 통화하다 무슨 말끝에 새까만 후배가 까불고 있다고 하곤 같이 웃었다.

세상은 변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구태(舊態)가 엄연히 작동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내가 맞고 틀리고를 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아직도, “이 어린 것을.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하시던 할머니의 한숨 소리가 귓전을 맴돌 뿐이다.

내 소년기는 무지개처럼 아름다웠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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