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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진을 찍어야겠다

by 임진채

이번에 운전 면허증 갱신 신청을 위해 사진 찍으러 갔을 때, 우리 집에는 가족사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내 윗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할아버지를 포함한 것이든 아버지가 중심이 된 그런 사진이든 전혀 한 장도 없다. 그건 가족사가 순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 한(恨)이 작지 않다. 언젠가 그 이야기할 날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장담할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아들만 셋을 낳았다. 그 아이들을 다 키워서 결혼시켰고, 내 아들들은 약속한 듯 아이를 둘씩 나았다. 손녀 넷, 손자가 둘이다. 그래서 가족은 우리 부부를 포함하면 열네 명이나 된다.

이번 추석에 아이들이 모두 모이면 가족사진을 찍으면 어떻겠냐고 아내하고 의논했다.


아내를 만난 곳은 부산에서다. 그때 나는 스무 살, 아내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 어린것들이 뭐를 알았겠냐. 천지를 모르고 그냥 마음으로만 좋아했었다.

나는 고향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 밥 먹여주겠다는 곳이 없어서 1학년을 마저 채우지도 못하고 누나가 사는 부산으로 올라왔다. 내가 올라온 지 2년도 안 되어서 누나는 이혼하고 부산을 떠나버렸다. 그래서 나는 아직 촌놈의 티를 벗지도 못했는데, 부산 바닥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 된 것이다. 박명순이란 아직은 어린아이가 유일한 지인이었던 셈이다.

그런 형편에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 관한 일이었다.

유신 시절이었고 그때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어 기세가 등등하던 때였다. 신문에는 거의 다 수배되고 구속되는 이야기였다.

그때, MBC 라디오에서는 ‘신문고’라는 고발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전국에서 투고를 받아 일주일에 한 번씩 유명 성우가 직접 낭독하는 형식이었다. 유신 시절에 그런 프로가 가능한 것이 신기했는데 그 인기는 대단했었다.

나는 정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평소에 일하면서 느낀 불합리한 내용을 적어서 보냈다. 물론 편지다. 열흘쯤 후에 방송사에서 편지가 왔다. 내용 몇 가지를 보완하라는 것이다. 그러기를 두어 번 했는데 그러고는 방송사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이 한 달 정도가 지났다.

안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다음 주에는 부산의 00 주식회사를 찾아가겠습니다.”라는 예고 방송이 나온다.

일이 현실이 되자 나는 갑자기 두려웠다. 실명으로 글을 보냈고 내 자취방의 주소로 여러 번 우편물이 오고 갔기 때문이다. 방송이 나온 다음 날 회사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그 방송이 나온 지 열흘이 되기도 전에 내가 한 짓이라는 게 알려졌다. 그 시국에 그런 짓이면 예약이 없어도 바로 감방행이라는 말들이 나왔다.

회사에 못 나간 지 일주일 후에 사장님이 나를 보잔다는 연락이 왔다.


나를 본 사장님은 자신의 책상 곁에 의자 하나를 가져다 놓고 나더러 앉으라고 했다. 몇 대 맞을 각오를 했다. 감옥에도 갈 수밖에 없겠다고 체념했다.

“자네가 쓴 글을 읽어봤네.” 조용한 어조다. 그러고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의 뜻을 설명했다. 지금 이 시국에 누군가가 맘만 먹으면 이런 정도의 회사는 하루아침에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에 권하는 것이, 나이가 늦은 건 아니니 공부를 더 하라는 것이다.

인터폰으로 총무부장을 부르더니 내 월급과 퇴직금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 봉투에 자기 양복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어 함께 줬다. 부장이 가져온 봉투 두 개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나는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특출한 인물을 만난 것이다.


일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소문이 퍼져서 그 후 상당 기간 취직할 수 없었다. 사발통문이 돈 것은 아니겠지만 들어내고 난색을 보이는 곳이 많았다.

어떻게 지냈냐고?

아직은 여전하게 어린 ‘명순’이 도움을 받았다. 본인도 수입이 별로여서 후에 장모님이 되신 명순이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쌀이며 반찬으로 연명했다. 그때는 술 담배를 안 하던 때라서 견딜만했다. 친구들도 도와줬다.

내 일과는 보수동 헌책방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때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명순’이라는 존재를 가벼이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어려울 때 차마 떠나지 못한 사람이다. 그 고비를 넘기는 동안 돈이 없어 당장은 결혼하지 못했지만, 그 후에 아들 둘이 바라보는 자리에서 결혼식을 했다. 그리고 막내 하나 더 낳아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이 들으면 그저 그럴 시시한 이야기다. 사실은 내가 자신을 돌아봐도 그저 그렇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숱한 세월을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식구를 열 하고도 네 명이나 늘렸다는 것은·····.

(으~음. 달리 생각하니 그런 예는 밤하늘에 샛별처럼 많을 수도 있겠구나, 쩝.)

그래도 가족사진은 찍을 것이다. 이번 추석이 아니면 다음 설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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