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과 2008년 사이 문귀화 작가를 만났다. 당시 미술대학에 편입한 그녀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전도사였고, 기독교에 관심이 없던 난 사람에 대한 바른 태도에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한신대학교에서 신학으로 학, 석사를 마친 그녀는 보통의 미대생들에게 느껴지지 않는 인문학적 이론의 바탕과 철학, 심리학적 기본이 있었기에 지적인 태도가 자연스럽게 배어났다. 게다가 상큼하고 호기심 어린 그녀의 자세에 반했던 것 같다.
문 작가가 미술대학 졸업 후 몇 번의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10년 가까이 작업실을 함께 공유했으며, 내가 만난 많은 대화를 나누고 교류했던 후배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런 그녀는 눈에 장애가 있었다.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없었다.
주어진 시간이 그러했고 병원비의 부담이 그러했고 아픈 눈이 그러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지기도 했다. 시각장애의 고통은 그러한 상황을 만들었고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그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좌절과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시각적인 감각에 의존하는 작업이라 미술대학을 포기하고 신학대학에 입학하였던 그녀가 다시 꿈을 이루고자 ‘그림 그리는 목회자’가 되는 과정 또한 그렇다.
이번 전시는 그래서 매우 소중하다.
시각을 잃는 과정을 그림으로 그렸고 글을 쓰면서 이어갔으며 장애인문화예술원에 공모하여 전시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녀가 그린다는 것은 투쟁하는 것이고 삶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림은 그려졌고 다시 용기를 내었다.
켄트지를 눈앞에 매우 가까이 놓고 그려야 하는 그녀의 그림은 작지만 아름답고 경이롭다. “반복해서 눈알과 나무라는 고정된 형상을 기계적으로 그리면서 아직도 세상 어딘가에 나의 눈이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매일 ‘눈’을 기다리는 나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밝히는 그녀의 시간에서 난 희열을 보았고 몰입과 즐거움을 보았다. 눈은 그녀에게 대지가 되어 그녀를 쉬게 하고 울게 하며 살아가게 한다. 식물의 뿌리를 닮은 시신경이 자라는 그곳은 그녀의 유토피아이자 화두이며 그녀 내면의 나무가 깊숙이 자라는 영토가 되어준다. 그래서 다행이다.
문귀화 작가는 군산에 있는 동안 미술공감채움의 꿈다락토요문화학교 기획자, 열정을 다하는 예술강사, 문화예술활동가였고 그림 그리고 전시를 하던 작업실 동료였다. 우린 올해 바쁨 속에서도 시간을 정하여 보고 싶던 책을 전화로 읽어 내려가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나 또한 그 시간 속에서 그녀를 포함한 시각장애예술인을 생각하게 되었고, 장애예술의 방향 제시와 더불어 배려와 깊이, 장애인 비장애인의 협업을 다시 한번 소중히 느꼈다.
미술에 동지가 있다면 어떤 걸까?
우린 그녀의 미술적 동지가 되어주어야 하고 그녀가 끝까지 그리도록, 그리고 손끝의 느낌으로도 그릴 수 있도록 함께하는 것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