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by 정말

소변을 기다리는 일이 곧 내 삶의 어떤 결정을 기다리는 일과 다름없다는 듯, 한참을 변기에 앉아 있었다. 창문 너머 수십 마리의 참새는 윗집을 가로지른 전깃줄에 앉아 이 끝에서 저 끝으로 자리를 옮기며, 일제히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곤 했다.


하얗고 작은 창으로 훗훗한 바람이 낮게 깔리며 들어오고, 갈색, 짙은 갈색, 또 갈색의 참새들이 등장과 퇴장을 반복한다. 전깃줄 위 새들이 옮겨가는 자리를 보며 이 부서에서 저 부서로, 자리에서 자리로 옮겨 다니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날갯짓 한 번이면 날아갈 곳이 무수히 많지만 결국 늘 비슷한 자리로 내려앉고 마는 나는 한 마리 연약한 참새였다.


오천 원짜리 구내식당 점심을 포기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정규직, 계약직을 구분하지 않고 월급 차감 방식으로 종이 식권을 구매하면 되는 구내식당 점심은 가성비가 좋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두 달 전 회사 소통 게시판에 총무팀 담당자가 ‘구내식당 무임승차’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 식권 전자 시스템 도입은 급물살을 탔다. ‘몰지각한 직원을 색출하자’는 글부터 ‘21세기에 구태한 종이 식권이 웬 말이냐’는 글까지 댓글이 쏟아졌고 ‘좋아요’ 수는 한 시간 만에 전체 직원 수 오백 명을 넘어섰다.


전자 시스템은 사원증을 출입구 단말기에 찍어 결제가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다. 사원증이 없는 계약직에게는 얇고 하얀 플라스틱 카드가 배부됐다. 창백한 좀비의 얼굴처럼 아무런 생기도 없는 그 흰색 카드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회사 로고를 작게 넣거나 간단한 색상 포인트조차 없는 밋밋한 카드가 어쩌면 정확히 내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런 특별함도, 어떤 의미도 없는 그 카드가 바로 나였다.


전자 시스템 단말기는 지하 1층 구내식당 입구에서 당당하게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과일 그림과 아기자기한 꽃 그림이 섞인 큰 가림막 너머로 나는 시선을 던졌다. 본래 환한 크림색이었을 벽면은 어느새 퇴색되고 칙칙해져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갤러리의 대작처럼 자리만 차지했다. 그 앞에서 직원들은 빠르게 먹고 빠르게 자리를 비웠다.


늦게 온 직원들이 자리를 찾아 목을 빼고 기웃거리면 여기저기서 반찬을 정리하는 의식이 반복됐다. 톡톡톡, 젓가락 끝이 밥그릇을 두드리는 소리와 드르륵 바닥을 긁는 의자 소리가 신경을 스치듯 나를 지나쳤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빨라졌다. 먹는 속도도, 자리를 비우는 속도도, 나의 존재감도.


흰색 카드를 단말기에 댈 때마다 짧은 기계음이 울렸다. 나는 회사의 일원임을 확인받는 듯했지만,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저 밥을 먹는 일, 한 끼를 해결하는 일에 충실하면 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그깟 자존심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여태껏 그것 하나로 버텨온 삶을 인정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걸 지키겠다고 카드까지 써가며 버틸 생각은 없었다. 결국 나는 구내식당 대신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맛있게 드세요”라는 인사를 남기고 회사 문을 나설 때면, 햇살 쏟아지는 날엔 괜히 피부가 따갑고, 비 오는 날엔 축축한 공기가 몸에 달라붙는 듯했다.


왜 나는 단말기에 카드를 찍는 단순한 행동조차 두려운가.

왜 내 손에 쥔 흰색 카드 한 장이 이토록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가.

구내식당의 소란스러운 풍경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화장실에서 바라보는 참새 떼의 날갯짓이 한결 자유롭게 보였다. 전깃줄에 앉아 있는 그들의 날개는 생기 있게 포닥거렸고 작고 윤기 나는 눈은 계속해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반면 나는 겉모습도, 존재감도 없는 그림자처럼 적막한 집 화장실 창을 통해 밖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이렇게 피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변기의 물을 내리고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회사 게시판을 띄우고 흰색 카드 사진을 업로드하자 손가락 사이로 송골송골 땀이 스며 나왔다.


“내가 가진 이 흰색 카드가 나를 초라하게 만들고 두려움에 떨게 했음을 고백합니다. 계약직이라는 이름, 혹은 회사가 정해 놓은 작은 틀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구분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로 바라봐야 하는 건 서로의 이름과 얼굴, 함께 버텨내야 할 이야기가 아닐까요. 단순한 카드 한 장일뿐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 카드를 찍는 순간순간 사람이 정의되기도 합니다.”


글을 올리고 나서 한동안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손끝은 차분했다. 곧 게시판엔 ‘좋아요’ 표시가 하나둘 찍히기 시작했다. 누군가 짧게 남긴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당신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계약직은 아니지만 저도 그 카드가 불편했어요.”

“이참에 모든 직원분께 사원증 만들어 주세요.”


빠르게 뛰던 심장이 댓글 한 줄에 뜨거워졌다. 그때 창밖 전깃줄엔 앉아 있던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더니 뾰족한 지붕을 넘어 공원으로 사라졌다.


나도 저 참새처럼 자유롭게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돌아가야 할 곳이 선명해졌다. 내가 향해야 할 곳은 도망치는 어딘가가 아니라, 다시 마주해야 할 자리였다. 나는 회사로 조금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예전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