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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Apr 03. 2023

살아 있는 노래와 더러운 노래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13)

그러면 이제 「눈」이라는 작품을 읽어 보겠습니다. 김수영은 ‘눈’이라는 제목의 시를 세 편 썼습니다. 지금 읽을 작품은 1957년 작이고요, 1961년 1월 작품이 있고 다시 1966년 1월에 또 한 편을 씁니다. 각각의 작품은 느낌도 의미도 다 다릅니다.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널리 알려진 이 시는 구조가 그리 복잡한 작품은 아닙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에 대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는 것이 다라면 다입니다. 작품을 이렇게 평면화시키는 것은 그 깊이로 잠행해 들어가기 위한 예비 동작입니다. 살아 있는 눈에게 기침을 하자는 화자의 권유에는 비상한 힘이 있는데, 이 시의 매력은 바로 이 힘에 있습니다. “눈은 살아 있다”와 “기침을 하자” 교차 반복이 시에 힘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데, 시에서 모든 반복이 동일한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반복이 힘을 집중하는 경우는 반복을 통해서 시인의 간절함이 점점 더 고양되어 작품 자체를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 때입니다. 그리고 「눈」은 그 예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삶과 목숨은 사실 이 반복 운동 속에서 형성됩니다. 심지어 역사마저 반복이죠. 하지만 동일한 상태, 동일한 조건, 동일한 시간의 반복은 아닙니다. 이런 반복은 도리어 우리를 질식시켜버리죠. 우리는 반복을 통해서 존속하고 반복을 통해서 ‘다른 것’을 만들어갑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반복 운동은 우리의 존속을 위한 것만 거두어들이고 불필요한 것은 버립니다. 반복 운동은 우리를 위한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이는 생명 운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머리와 달리 심장이 반복하는 것은 그 이유입니다. 반복 운동은 단순한 순환도 아니고 옛것은 버리고 새것만 취하는 맹목적인 진보도 아닙니다.      


그런데 3연 2행은, 작품 형식적으로는 반복을 벗어나는 예외이면서 반복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눈에 기침을 하자는 반복의 동력은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입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는 생기를 잃어버린 무력한 상태를 말하고, 이즈음의 김수영의 위험, 즉 피로 상태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김수영이 말하는 “죽음”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살아 있는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입니다. 눈은 살아 있는데, 지금 “젊은 시인”은 살아 있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납니다.      


살아 있음에 반응하는 것은 살아 있음이고 그 살아 있음의 증거는 죽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을 잊은 살아 있음은 살아 있는 죽음이 아니라 죽은 죽음입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는데, “젊은 시인”은 지금 살아 있음이 점점 꺼져가고 있습니다. “기침을 하자”의 반복을 그것의 반증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지만 느낌이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죠? 왜냐면 시의 화자가 자신이 곧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흔하게 쓰는 말 중, 성찰과 사유라는 게 있습니다. 이 말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따지기 전에 상당히 피상적으로 성찰과 사유라는 말을 남용하죠. 우리가 생활에서 저지르는 오류들 또는 적절치 않은 판단이나 행위들을 돌아보는 게 마치 성찰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가 회개 기도를 하면 된다는 듯이 성찰의 의미를 자신도 모르게 깎아내리죠. 사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인 수준의 사고를 한다는 게 사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듯싶습니다. 저는 여기서 되지도 않게 여기서 성찰과 사유라는 게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성찰의 이름에 값하려면 보다 근원적인 지점까지 들여다봐야 하고, 사유라고 한다면 최소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사고의 구조가 무엇에 기반해 있는지 그리고 그 구조의 역사적 맥락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성찰과 사유는 그래서 한몸인 겁니다. 단순하게 지신의 과오를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것은 성찰과 사유에 미치지 못한다고 저는 봅니다.     


김수영이 생활에서 느끼게  피로와 비애는 1958 즈음 가면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1957 무렵에는 「눈」에서 봤듯이 점점 다가오는 피로 같은 부정적 정서와 대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살아 있긴 합니다. 제가 성찰에 대해서 말씀드렸다시피, 「서시」에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이 보입니다. “나는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다 시작되는 「서시」에서는 “정지 “휴식 말하고 있는데, 성찰과 사유는 한몸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성찰에서 사유 사이에는 “휴식 있기 마련입니다. 이는 심리적인 작용이기도 하죠.      


옛길의 과오를 성찰한다고 해서 새로운 길이 바로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찰이 불러들인 휴지기가 있기 마련인데, 「서시」에서는 그동안 자신이 “정지의 미에 너무나 등한하였다”고 하면서 나무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힙니다. 그러면서 “성장은 소크라테스 이후의 모든 현인들이 하여온 일”이고, 여기서 “성장”은 “첨단”과 상통합니다, 펼쳐진 역사에 대한 “정리는/ 전란에 시달린 20세기 시인들이 하여 놓은 일”이라고 합니다. “20세기 시인들” 중에 김수영 자신이 속할지도 모릅니다. 그 또한 “전란에 시달린” 시간을 살아왔으니까요. “전란” 같은 사건에 대해 어떻게든 “정리”가 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문제는 “첨단”이나 “전란” 속에서도 “나무는 자라고” 있고, “정리”를 단행한다고 해도 역사는 흐르기 마련입니다. 나무도 영혼도 자라고 있지만, “정리”를 통한 “교훈”도 그리고 역사가 강제하는 “명령”도 살아 있기 마련입니다. 생명(“나무”)만 살아 있는 게 아닌 거죠.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역사도 살아 있습니다. 견강부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 김수영은 생명과 역사, 그리고 영혼을 함께 돌아보고 있습니다.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입니다. 서광이 밝아오는 새벽이 아니라 “밤”이죠. 자신이 사는 역사가 “밤”이라는 뜻입니다. 이 밤으로서의 자기 시대에 대해 말하기를, “나는 그러한 밤에는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고 합니다. “부를 줄도 안다”는,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지금 밤을 맞아 부르는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라고 읽힙니다.      


왜냐하면 그런 노래는 “지지한 노래”이고 “더러운 노래”이며 따라서 “생기 없는 노래”이며 결국 다시 “하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고 거기에 대해 “마음 놓고 기침을” 해야 하지만, 그게 사실은 지지하고 더럽고 생기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침”이 다시 “하나의 명령”일 수 있는 현실이 지금 김수영의 현실입니다.   

   

내가,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것 같냐? 하지만 안 부른다. 사실 이런 김수영의 어투는 낯선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눈 위에 하는 기침도 결국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가 아니냐? 왜냐면 김수영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은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지금은 자라는 나무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그러니까 지금은 역사로부터 생명과 영혼으로 잠시 돌아가겠다.      


여기서 김수영이 말하는 “명령”이 무슨 뜻인지 명료하게 해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가장 편하게는, 김수영이 살았던 정치적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명령은 두 가지 뜻으로 풀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복종을 요구하는 외부로부터의 지시 혹은 요구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내는 명령인데 이는 다른 이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기는 한데 굴종이 아니라 어떤 사태의 정립 혹은 지평의 확립 같은 것입니다.

     

명령이란 본질적으로 지평을 정립, 확정하는 것이며 사실 생명체는 이러한 명령 없이는 생존할 수 없죠. 문제는 이 명령이 사회적인 또는 정치적인 관계에서 사고 되면 권력자의 독점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명령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일방적이게 되고, 이 명령의 위계화는 가족 관계나 직장 등 미시적인 구조에까지 오염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또 어느 의미에서이건 사회나 국가의 안정을 꾀합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안정인가가 되겠죠. 김수영이 “명령”을 어떤 의미로 썼든지 간에 명령이 함축하고 있는 맥락이 무엇인지 한번 물어보는 일은 시를 읽는 데 도움이 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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