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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Apr 10. 2023

‘때’를 기다리는 마음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14)

                 

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을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이 작품은 김수영이 쓴 서정시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지 않나 하는 시입니다. 아직은 1957년입니다. 가슴속 깊이 품고 있는 염은 현실과 만나 줄탁동시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고,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날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월 단위로도 그렇고 웬만해서는 일 년이 넘어가도 여전히 자신이 제자리인 것만 같아 답답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가끔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큰 아쉬움과 더불어 조급함이 드는 일은 자주 있는 현상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먼저 여러분의 일상 경험을 바탕에 두고 읽기를 권합니다. 어렵지 않은 시이면서 위로를 주는 시이기도 합니다. 조금 편안하게 읽어 보죠.     


지난밤에 시내에 나가 술을 많이 마신 모양입니다. 김수영이 술에 취하면 주사가 좀 있다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산문 「낙타 과음」에서 본인이 직접 고백하기도 하죠. 만취했을 때, 절제했던 감정과 욕망이 분출되는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겁니다. 김수영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바라는 것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도 자신의 생활도 진전이 없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다음 날 숙취가 어느 정도 가신 밤에 돌아보니, 어쩌면 하루종일 그랬을지도 모릅니다만, 자신이 너무 서두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너무 애태우지 말자는 다짐을 하고 있는데, 혹 그 애태우는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혁혁한 업적”을 바라는 마음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날 밤도 평상시와 같이 마을에서는 개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멀리서 종소리도 들리고 달이 떴습니다. 이 변함 없는 일상을 살면서 완강한 현실에 당황하지 말자는 다짐을 해봅니다.  

    

어제 마신 술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숙취 때문에 몸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하지만 계절은 만물이 다시 생장하기 시작하는 봄입니다. 서두를 필요가 없지요. 「서시」에서 말했듯이 지금껏 “너무나 많은 첨단의 노래만을 불러왔”지만 나무는 자라고 있지 않습니까?     


이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으로는 서두른다고 될 일은 없습니다. 설령 자신의 꿈이 실현되지 않은 채 여느 때처럼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말입니다.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멀리 한강 철교 위로 지나가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서둘러서 될 일은 없습니다. 밤에 철교 위를 지나가는 기차를 본 경험들이 있으십니까?

     

저는 어릴 때 만경강 철교 위를 지나가는 기차를 보면서 그리움과 더불어 멀리 떠나지 못하는 슬픔을 느낀 적이 제법 있습니다. 멀리 나가면 여기와는 다른 세상이 있을 것만 같은 그리움은, 그러지 못하는 현실에 붙박여 슬픔으로 변합니다. 김수영의 깊은 곳에는 “빛”이 살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거미」) 타버릴 지경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슴속에 있는 “빛”을 꺼버려서도 안 됩니다. “빛”이 자신의 시대를 태울지 어쩔지는 알 수 없지만, “빛”을 버리면 우리는 본능에 묶여버리고 맙니다.  

    

생명의 본능은 우리의 이성적 사고를 통해 보다 더 높아(깊어)져야 하고, 이성적 사고는 “빛”을 따라 종교로 고양됩니다. 제가 말하는 종교는 제도화된 기성 종교가 아닙니다. 본능과 이성, 그리고 감성과 영성은 우리 몸 안에 본래 갖춰져 있는 것인데 시대와 문화에 따라 하나가 다른 것들을 억압하면서 과대 대표합니다. 김수영의 시에서 영성은 지금껏 잘 조명되지 못했습니다만, 그것은 우리가 이성적 사고를 강요하는 ‘시대의 명령’에 익숙해서일지도 모릅니다. 근대주의적 사고방식이죠. 좋은 시에는 과연 어딘가에 영성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밤은 낮이 보이는 시간입니다. 낮에는 밤이  보일지 모르지만 밤은 낮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 “모든 것이 보이는시간이 밤입니다. 밤이 낮을 비춰준다고 해서 곧바로 밤의 시간이 낮의 시간을 대체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밤이 낮을 비춰준다고 해서 낮이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니체처럼 병들었을 때는  눈으로 건강을 바라보고 건강할 때는 건강한 눈으로 병듦을 바라보면서 병과 건강의 의미를 다시 정립할  있지요.  말은 삶과 죽음의 관계에도 적용해볼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죽음은 경험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 죽음에서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실제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만, 죽음을 잊지 않는다면 삶을 죽음이라는 배경 앞에 세워 두고 숙고할 수는 있습니다. 삶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죽음을 바라본다는 것은 “죽음을 가지고 죽음을 막고”(「병풍」) 있는 다른 무엇(‘병풍’)을 통한다는 의미입니다. 밤은 “모든 것”을 보이게는 합니다만 밤이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나는 아직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때’를 안다는 것은 ‘때’의 부름에 제대로 응답한다는 뜻이지 작위적으로 ‘때’를 만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근대적이고 진보적인 정신은 ‘때’를 만들지 못해 안달입니다. 하지만 ‘때’는 능동적으로 ‘때’를 준비하고 그것을 맞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옵니다. 그리고 ‘때’를 오롯이 자신이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때’를 자기가 만든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깊은 허방으로 빠지고 맙니다. 「도취의 피안」에서도 이런 인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날짐승”에게 “너는 날아가면 고만이지만”이라고 말하죠.

     

「봄밤」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끝까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고 다독이면서 맺습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1연의 시작을 “애타도록”이라고 하고 마지막에도 “애타도록”이라고 한 점에 주목합니다. “절제여” 이하는 후렴구이니 실질적인 마지막은 역시 “애타도록”입니다. 자기 자신을 다독이는 작품이지만 현재 마음은 애가 타고 있다는 것을 이 시는 드러냅니다.  

    

이 애타는 마음을 절실하게 느껴야 1958년을 지나서 찾아오는 피로와 비애와 꿈을 버리는 게 낫겠다는 체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1958년에 들어와서 느끼는 지독한 피로와 비애는 이 애타는 마음의 반작용이고 그것이 「달밤」에서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까지 가게 한 것입니다. 서둘지 말자고 자신을 다독이는 시간도 밤이고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고 말하는 시간도 밤입니다.     

 

「봄밤」이 1957년 봄에 쓰인 것이고(발표는 12월입니다만), “지금 헛되이 보내고 있구나”라고 「봄밤」에서 한 걸음 후퇴한 「밤」은 1958년 작품이며,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고 어쩌면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달밤」이 1959년 작품인데, 공통적으로 작품에 나타난 시간대가 ‘밤’입니다.     


그리고 「봄밤」과 「밤」 사이에 「비」가 있는데, 이 작품도 밤에 쓴 시임이 작품 내용에서 드러납니다. 자신을 다독이는 「봄밤」을 거쳐 「비」에서 “비애”를, 다시 「밤」에서 ‘헛됨’을, 「달밤」에서 “이제 꿈을 다시 꿀 필요가 없게 되었나 보다”까지 김수영의 내면은 후퇴하고 있습니다. 이게 1957년에서 1959년 상반기까지 김수영의 내면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봄밤」에서 느끼는 서정은 비관의 입구에 해당됩니다. 이 시를 계속 읽다 보면 자기 위로의 밝음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떠받치는 것은 어떤 슬픔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시가 우리에게 오래 남는 이유는 밝음과 어둠이 동시에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둠은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만 읽으면서 차오르는 어떤 슬픔 같은 게 있습니다.      


누차 강조하는 바지만 좋은 시는 이렇게 여러 겹의 서정과 인식과 감각으로 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의 정신과 내면도 여러 겹의 꽃잎을 가진 꽃으로 비유해도 무방한데, 가능한 한 그 꽃잎은 많은 게 좋습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꽃잎이 모두 다 개화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꽃잎은 뒤로 물러나 있고 어떤 꽃잎은 다른 쪽을 향해 있고 하면서 한 송이 꽃을 피워야 하는 거죠. 아름다운 꽃은 화실에서 피는 꽃이 아니라, 많은 관계와 작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꽃을 이름하죠.    

  

고유성은 폐쇄성이 아닙니다. 고유성은 관계를 통해 다른 사물의 고유성을 함축하면서 다른 사물을 고유하게 존재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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