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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Apr 17. 2023

어둠에서 밝음으로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15)

「비」도 지금까지 읽어온 김수영을 떠올리면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실 김수영의 시에서 쉬운 시가 별로 없기도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여유도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비”가 “비애”라는 사실입니다. 비가 내리는 밤에 비를 눈물이나 슬픔으로 은유하는 일은 그렇게 비범한 표현이 아닙니다. 하지만 김수영은 한걸음 더 나아가 “비애”라고 하고 있습니다. 내리는 비가 비애라고 하니 슬픔의 농도가 더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부르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럴 겁니다. 그리고 시행을 짧게 끊었죠.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     


그런데 그 “비애”가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비가 조용히 오지 않고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것을 “움직이는”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 흩날리다가 다시 조용히 내리다가 그러는 밤일지도 모르죠. 이런 상상은 우리의 느낌을 조금 더 풍부하게 해줍니다. 사실 화자의 정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는 게 작품상으로는 보다 ‘정확’하겠지만, 시를 좀 더 감각적으로 읽어야 정서 상태도 생기 있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이런 우리의 감각은 2연에서 여지없이 확인됩니다.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가 그것이죠. 2연은 1연을 풍부하게 반복합니다.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 가운데”는 김수영이 갖고 있는 현실 인식과 정서가 뒤섞인 진술로 읽힙니다만 이 이상 해석은 견강부회를 불러올 수 있어 멈추겠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가운데에 “비”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른 채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데, 그것이 ‘투명하게 움직이는 비애’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김수영의 영혼 상태가 드러납니다. 자신은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로 싸여 있습니다. 여기서 ‘비애’를 느끼는 거죠. 전쟁이 끝난 이후 가졌던 ‘설움’과 좀 다른 뉘앙스가 느껴지죠.    

 

‘설움’이나 ‘비애’ 같은 수동적 정서인데, ‘비애’가 더 농도가 짙습니다. 『논어』에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이란 말이 있는데, 공자가 『시경』에 있는 시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전체적으로는, 기쁨을 노래하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마음 상하지 않게 한다, 정도 될 것입니다. ‘애이불상’에서 ‘애’가 ‘설움’ 정도라면 슬퍼서 마음을 상한 상태가 ‘비애’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역설이 있습니다.      


공자는 중용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지만, 시는 사실 그 중용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아니, 중용은 ‘상(傷)’의 상태를 건너오지 않고는 다다를 수 없으며, 시는 중용보다는 ‘상(傷)’의 상태에서 나오고는 합니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4‧19혁명 직후에 김수영은 「중용에 대하여」라는 작품을 쓰는데, 중용을 빙자한 세상의 “답보”와 “나태”를 질타합니다. 세상에서 보통 말하는 ‘중용’은 언제나 ‘어중간’이긴 합니다.  

   

그런데 지금 김수영의 ‘비애’는 투명하면서도 움직입니다. 3연에 대해서는 섣부른 해석을 하지 않겠습니다. “명령하고 결의하고/ ‘평범하게 되려는 일’”과 같은 김수영의 현실 인식이라고 받아들이는 수준에서 멈추겠습니다. 투명하게 움직이는 비애라고 해도 마음에 그림자를 남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것을 “사랑하라”고 “여보”에게 말하지만, 이 말은 시인이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인’은 자아가 여럿인 존재를 이르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분열된 자아가 여럿이라는 말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자아가 여럿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여보”는 아내에 대한 실감에서 시작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여보”가 시 안으로 들어오면서 시인의 다른 자아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해석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면 안 됩니다. 실제로 ‘여보’를 그대로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인데, 어디까지나 시의 해석은 작품 내의 맥락에 근거해야 합니다.      


비근한 예를 지나가는 말로 덧붙이자면, 「채소밭 가에서」의 “너”와 조금 있다가 살펴볼 「사랑」의 “너”는 다른 ‘너’입니다. 일률적인 해석 틀을 적용하게 되면 과잉 해석이나 과소 해석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것은 시인의 시를 읽는 게 아니라 읽는 이의 자기 주관을 앞세우는 일이 됩니다. 읽는 이가 자신의 안에 다른 시를 쓰는 것은 좋은 독법이긴 합니다만 견강부회까지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김수영은 지금 자신의 비애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너의 벽에 비치는 너의 머리를/ 사랑하라”는 전언은 바로 앞 구절, “비 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의 반복입니다. 여기서 “마음의 그림자”는 “비애”를 가리키는데 김수영은 이 “비애”가 존재의 ‘그림자’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사는 인간인 한 그림자를 갖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입니다. 여기서 그림자는 부정적인 무엇이죠. 「봄밤」에서 말한 ‘서두르는 마음’도 그림자입니다. 「봄밤」에서 나타나는 “서두르는 마음”을 「채소밭 가에서」에서는 다독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존재인 인간이 존재의 그림자를 갖게 되는 것은 필연이라고 해서 그것을 방기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림자는 다른 그림자를 불러오기 때문이지요. 그림자는 계속 생기지만 우리는 이 그림자와 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림자의 번식을 용인하면 언젠가는 존재를 집어삼킵니다. 자아의 붕괴를 불러들일 수도 있고 우리를 광기에 빠뜨릴 수도 있으며 드디어 파괴의 편에 서게도 합니다. 정치적으로 돌변하면 권력과 지배와 자리를 탐하게 되죠. 혹은 경제적 부에 집착하게도 합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비」에서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는 「채소밭 가에서」에서는 “기운을 주라”와 통합니다. 왜 기운을 주라고 주술을 읊듯 하는 걸까요? 지금 “바람이 너를 마시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람”은 그림자가 번식하면서 일으키는 바람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존재도 아니고 자연의 바람도 아닙니다.      


「비」에서는 이렇게 김수영이 비애의 상태에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비 오는 날의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결의하는” 일도 “변혁하는” 일도 “비애”인 현실에서 “오늘은 너 대신 비가 움직이고” 있지요. “너의 ‘종교’를 보라”는 진술은 여전히 모호합니다만, 내리는 비가 갖게 하는 “마음의 그림자를/ 사랑”하는 일이 지금의 종교라는 뜻 같기도 합니다. 지금 현실(“비”)도 움직이고 비애도 움직입니다. 요동이라고 할까요, 혼란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너무나 많은 움직임” 속에서 “밤을 모르고/ 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 비애는 갈 곳을 모르고 있습니다. “첨단”은 그만큼 좌절하기도 쉬운 게 세상 이치입니다. 김수영은 자신의 꿈이 “첨단”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문학적 자신감이랄까 긍지랄까 아무튼 그런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첨단의 아침놀’이 뜨는 “새벽”이 아니라 “밤”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 시간입니다.      


「서시」에서 “부엉이의 노래를 부를 줄도 안다”고 했지만 그 노래는 “지지한 노래”요 “생기 없는 노래”라고 했지요?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휴식”인 것을 김수영은 알고 있었으나 그 휴식은 모든 것을 방기하는 휴식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비애”가 마지막 연에서 “움직이는 휴식”으로 화하는데, 그러니까 휴식도 비애의 다름 아니지만, 기어코 “그래도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몸부림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런 정서는 다음 시간에 읽게 될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도 다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시를 텍스트로만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텍스트 이면에는 언어로 드러나지 않은 ‘거시기’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복잡한 정서일 수도 있고, 아직 앎으로 환원되지 않은 모름일 수도 있습니다. 시는 앎을 근거로 해서 시작하지만, 미처 언어가 되지 못한 정서나 무의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식의 확장이 아닙니다.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는 것이기도 하고 시인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심연을 향한 조명이기도 합니다. 김수영이 산문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에서 “모든 시의 미학은 무의미의―크나큰 침묵의―미학으로 통하는 것이다”고 말한 것도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왕 이 문제적 산문을 언급했으니 한두 마디 더 해보도록 하지요. 왜냐하면 이 글에서 지금의 우리에게도 매우 유의미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시들이 새로운 시적 현실을 발굴해 나가는 것과 같은 비중으로 존재 의식을 상대로 하는 시는 새로운 폼의 탐구를 시도해야 하는데, 우리 시단에는 새로운 시적 현실의 탐구도 새로운 시 형태의 발굴도 지극기 미온적이다. 소위 순수를 지향하는 그들은 사상이라면 내용에 담긴 사상만을 사상으로 생각하고 대기(大忌)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시의 폼을 결정하는 것도 사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미학적 사상의 근거가 없는 곳에서는 새로운 시의 형태는 나오지 않고 나올 수도 없다.      


여기서 “미학적 사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 이상의 자세한 진술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미학을 결정하는 사상, 혹은 아름다움이 표현하고 있는 사상 정도로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시에서 사상은 명시적으로 언명된 것만이 아니라는 지적도 합니다. 시에서 사상은 단순히 시인의 주의‧주장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시인의 주의‧주장이 “시의 폼을 결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려면 그 사상이 시인의 무의식에, 즉 온몸의 구성 요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앎을 근거로 출발한 시 짓기는 아직 언어화가 되지 않은 자신의 심연까지 파고들 수 있습니다. 시인의 사상은 시의 텍스트만 창출하는 것이 아니고 텍스트를 떠받치는 거대한 바다를 이루죠. 이 바다의 출렁임은 그러나 텍스트를 통해 감지됩니다. 그리고 이 바다가 어떤 바다인지 결정하는 것은 시인의 연마나 쟁투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텍스트의 성립도 시인의 연마와 쟁투가 결정하지만, 텍스트를 만드는 바다도 그 연마와 쟁투가 결정합니다.      


시의 언어는 텍스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바다를 포함합니다. 왜냐면 바다의 출렁임 따라 텍스트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죠. 여기서 텍스트는 바다가 일으키는 물방울 또는 파도입니다. 시를 읽을 때 먼저 ‘느낌’을 얻으라고 주문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마지막 행인 “그래서 비가 오고 있는데!”는 이 시를 쓸 당시 김수영의 “비애”를 더욱 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왜냐면 그는 비애 속에서도 “새벽을 향하고 있는” 마음을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새벽을 향하고 있는” 마음이지만 김수영은 어느새 밤 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이것은 김수영 자신의 책임도 책임이지만 역사적 조건이 더 크게 작용합니다. 

     

195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점점 더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으니까요. 김수영의 ‘참여시’는 이렇게 깊은 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4‧19혁명에 과하게(?) 몰입했던 것은 “새벽을 향하고 있는” 1950년대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년에 내놓은 ‘온몸의 시’도 그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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