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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관 May 02. 2023

사랑을 배우다

―김수영 시가 어렵다고?(17)

이제부터는 김수영이 다시 믿음을 회복하는 작품들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보에 의해 추정하는 것이니 김수영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회복의 기미는 「동야(凍夜)」에서 시작됩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지금은 「사랑」과 회복의 기운이 완연해 보이는 「파밭 가에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랑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그러나 너의 얼굴은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은  

   

개정판까지만 하더라도 이 작품은 4‧19혁명 이후에 쓴 것으로 알려졌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사랑”은 4‧19혁명을 가리키고 그 혁명이 진전되지 않는 불안을 시로 썼다고 해석되었었죠. 하지만 이번 재개정판에서는 1960년 1월 31일에 발표한 것으로 고쳐졌습니다. 그 뒤로 연구자나 비평가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저는 모릅니다만, 이 시를 연애시로 보는 연구자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봐도 연애시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관념적인 냄새가 나지 않나요?     

 

앞에서 잠깐 말했지만 여기서 “너”는 일테면 「파밭 가에서」의 ‘너’와 다릅니다. 텍스트 그대로 읽자면, 너로 인해서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는 겁니다.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잠시 한참 뒤에 쓴 「사랑의 변주곡」으로 가볼까요. 다음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 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이 시에서도 사랑을 배웠다는 진술이 나타납니다. 혁명이라는 사건을 통해 배웠다고 하고 있죠? 「사랑의 변주곡」이 「사랑」의 확장판 같긴 한데, 그리고 무언가가 반복되고 있다고도 느껴집니다만, 두 작품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죠. 바로 혁명을 겪기 전과 후라는 차이입니다. 정확하게 「사랑의 변주곡」은 혁명과 연이은 쿠데타 이후 긴 모색 끝에 도달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배우다’는 공통점이 있고, 「사랑」에는 역사적 계기가 개입된 게 아니라 순전히 정신의 힘으로 일어난 시인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변주곡」은 「사랑」보다 구체적인 작품이고 또 웅장한 작품입니다. 이것이 역사적 사건을 경험했느냐 아니냐의 차이기도 하죠. 시는 역사적 사건과 관계없다는 예술파들의 지론은 창백한 관념일 뿐입니다. 관념 자체가 역사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구도 행위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소승(小乘)적인 시 쓰기에 불과하죠.     

 

여기서 “너”는 무어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김수영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존재인 건 맞습니다.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는 “꿈”이라든가 “별”, “새벽”이 “너”라는 인격체로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이런 방식은 시에서 사실 너무도 흔하지요. 추상적인 절대자를 ‘그대’라고 부른다든가 만해처럼 ‘님’으로 부르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순간, 예를 들어 ‘초월’이 대지가 아닌 천상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김수영이 천상을 지향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훗날 “대지에 발을 디딘 초월시”(「새로운 포멀리스트들」) 운운했던 데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대지를 떠나지 않은 시를 대망한 시인이었습니다. 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앞에서 읽은 「동맥」에서도 드러나죠. “이 눈망울을 휘덮는 시퍼런 작열의 의미가 밝혀지기까지는/ 나는 여기에 있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꿈”이나 “별”, “새벽” “너”는 대지에 서 있겠다는 의지와 태도를 가질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존재에 가깝습니다. 제 생각에는 김수영에게 하이데거의 영향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하고요, 하지만 그것은 하이데거에게 일방적인 사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김수영의 시적 지향 자체가 하이데거와의 만남을 주선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런데 이 존재를 의식적으로 또 관념적으로 추구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희망은 가능/불가능의 문제이지만, 믿음은 실재에 관계됩니다. 믿음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실재를 향합니다. 실재가 현실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다는 느낌은 희망이 아니라 믿음을 주죠. 그리고 그 믿음 속에서 “사랑을 배웠다”고 하면 어떨까요.     

 

만일, “너”를 앞에서 얘기한 “벗들”과 “이웃들”, 즉 민중이라고 읽으면 전혀 엉터리는 아닙니다만 느낌의 진폭이 빈궁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너”이든 “꿈”이든 “새벽”이든 그것은 김수영의 마음과 정신에 웅크리고 있는 비원입니다. 그리고 이 비원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역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삶이 변화해야죠.      


지난 시간에 한용운의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를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만일 김수영을 “장미화”로, 아직 이뤄지지 않은 비원을 “봄비”로 대입시키면 어울리겠습니까? 지금 “장미화”에게는 “봄비”가 절실합니다. 하지만 봄비가 아직은 오지 않습니다. 오기는커녕 한용운의 시대는 그 “봄비”가 간 시대였습니다. 비록 한용운 자신이 보내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한용운이 할 수 있는 일은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김수영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너로 해서”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는 사실입니다. 김수영이 ‘다시’ 믿음을 회복했다고 말한 것은, 그 사랑을 “어둠 속에서도” 배웠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꼭 “어둠 속에서”만 배운 것은 아니죠. “불빛 속에서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가 가르쳐주는 “사랑”은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있긴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금 다시 배우고 있는 것인데,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졌다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둠 속에서도” “사랑”은 있었지만 그것을 자신이 잃고 있었다는 고백이 되기도 합니다.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꺼져 있던 “사랑”이 살아났습니다. 어두운 내면에 불이 들어온 것입니다. 하지만 회복은 회복인데 그 회복된 상태가 안착할 수 있는 현실의 지점이 부재하기에 “불안하다”고 말합니다. 어두운 내면에 밝은 불빛이 들어오는 “찰나”에 잃었던 “사랑”을 다시 배우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내면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입증될 현실은 아직 부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 속”은 앞에서 살폈던 피로, 비애, 좌절 같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봄밤」에서 시작해 「싸리꽃 핀 벌판」까지는 확실히 “어둠 속”이라고 부를 만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제가 앞에서 작품을 통해 말했던 것 그대로입니다. 3연에서 “번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이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하늘은 어두운 상태입니다. 먹구름이 끼었는데 번개가 지나가면 그 주위가 순간 환해졌다가 다시 사라지죠.     

 

이 이미지는 ‘불안한 너의 얼굴’과 의미상 상통합니다. 다만 번개가 가르고 간 먹구름이니 하늘에는 어떤 전조들이 가득하죠. 단순한 소나기의 전조일지 거친 폭우의 전조일지 그것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뭔가 아슬아슬한데, 아무래도 긍정적인 쪽으로 기운 아슬아슬함만 같습니다. “번개”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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