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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희 Feb 13. 2022

냉면

냉면 한 그릇의 달달한 완성

 면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냉면의 기억은 각별하다. 부모님 모두 이북분이시라 냉면은 만두, 녹두빈대떡과 더불어 나의 소울푸드다. 전후 대전에 자리 잡은 사리원분이 차린 사리원면옥에 부모님 따라 드나들었다. 우리와 같이 살게 된 외할머니도 기분 좋은 날이면 도라에몽 주머니 같던 커다란 속바지에서 돈을 꺼내셨다. 그러고는 우리 자매들을 봄나들이 가는 오리가족처럼 평양냉면집에 데려가곤 하셨다. 물냉면에 사리까지 필수로 주문해 터질 듯 빵빵한 배를 부여잡고 나와야 했다.


 냉면은 그렇게 백석의 '국수'라는 시로 경건시된다. 이북의 눈 내리는 겨울 쩔쩔 끓는 아랫목에서 이를 덜덜 부딪혀가며 먹는 축제 같은 즐거운 음식으로 추억된다. 감자가 많이 나던 함경도 지방에선 감자로 면을 만들었다. 그래서 잘 끊어지지 않는 가는 면발에 비빔냉면이 어울렸다. 메밀이 재배되던 평안도 지방에선 메밀로 면을 만들어 질기지 않고 잘 끊어졌다. 겨울철 땅에 묻어 놓은 동치미와 꿩, 닭, 소고기 육수가 만나 슴슴하고 시원한 평양냉면이 되었다.


 메밀은 탄수화물보다 단백질의 함량이 높아 살이 찌지 않는 음식으로 알고 있다. 물론 육수의 고칼로리는 어찌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이야기가 있다. 대학 때 친구의 전직 판사였던 할아버지도 이북분이셨는데 잘 아는 냉면집에서 머슴처럼 일하던 할아버지가 있었단다. 이분의 주식은 사시사철 냉면이었다고 한다. 양만큼은 세숫대야만큼 많이 드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마 무시한 노동량 때문인지 냉면이 살로 가지 않았는지 그분의 몸에선 지방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냉면을 좋아했다. 냉면을 먹으러 가는 건 부모님 고향의 자부심을 먹으러 가는 것 같았다. 대통령이 북한에서 김정은과 평양냉면을 먹는 모습을 보고 기뻤다. 비록 조롱거리로 전락하긴 했지만 그 후 일어난 평양냉면 붐도 반가웠다. 사실 평양냉면의 싱거운 맛은 매력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다. 그 슴슴한 맛은 부지불식간에 단맛으로 변해왔다. 외국요리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한국식 외국요리가 되듯이 말이다. 이미 이북 정통의 맛에서는 멀어져 왔다.


 어릴 적 대전 유성의 숯골 냉면이라는 곳에도 갔다. 역시 이북에서 남하하신 분이 가정집을 개조해 음식점으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이곳의 국물 맛은 그 당시에도 사리원 면옥의 국물과 다르게 밍밍하고 달달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지금은 성대하게 새로 지은 숯골 냉면의 냉면은 충분히 달아졌다. 일 년 내내 똑같은 맛을 내는 이 집의 동치미 무도 단무지처럼 달다. 


 언니와 베이징에 있는 북한 식당에 가게 됐다. 북한 미녀들의 가무를 즐기며 평양냉면을 먹을 기회가 있었다. 그 냉면엔 엉뚱하게도 수박이 얹어 있었는데 국물 맛은 우리가 평소에 맛보던 냉면육수가 아니었다. 단맛은 조금도 끼어들지 않았던 순박한 맛이었다. 몇 년뒤 대전 한남대 정문 앞에 탈북민 부부가 냉면집을 개업했다. 그중 아내분의 한 손은 의수였다. 혹시 탈출하다 손을 잘리게 된 건 아닌가 맹랑한 상상을 하게 했다. 여기서도 국물을 마셔보니 중국의 북한 식당에서 먹어본 그 냉면의 맛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평양냉면의 참맛이라 알았던 건 변형된 냉면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인터넷에는 다시다와 설탕만으로 냉면육수의 맛을 재현해 내는 사람도 있단다. 냉면 마니아인 소설가 성석제는 냉면집에 소고기 수육이 없으면 직접 육수를 내는 집이 아니란다. 맞는 말이다. 역시 오래전 언니네 집 옆으로 동네 냉면집이 생겼다. 평양냉면집이고 사리원면옥과 비슷한 맛을 냈다. 어느 날 언니가 그 집에서 냉면을 먹고 있었다. 사장님이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육수통 쪽으로 가시더란다. 그러고는 하얗고 반짝이는 가루를 육수통에 쏟아붓더란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거친 메밀이 기계식 면발에서 국수가닥으로 뽑아져 나왔다. 국수 삶은 구수한 면수를 들이켠다. 육수 빼고 남은 고기가 얇게 저며지고 길게썬 동치미 무, 시원한 배와 오이절임이 올라간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동치미 국물과 고기의 아미노산 단맛이 만나 만드는 국물의 하모니. 그렇게 냉면은 목구멍으로 부담 없이 술술 뚝뚝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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