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헐크 있다.
화의 원인은 결국 나에게 있다.
'내 안에 헐크 있다.’ 기질이 온유하여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다툼을 싫어하는 나는 피스 메이커였다. 그런 나에게 ‘육아’는 새로운 세계였고, 나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또 너무나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기쁨을 선사해 주는 동시에 자타가 공인하는 온화한 엄마를 종종 헐크로 만들었다.
얼굴 가득 온화한 미소를 띠고 사랑스러운 손길로 아이를 어루만지는 자애로운 엄마의 모습. 언젠가 명화에서 봤을법한 엄마의 이미지를 닮고 싶었으나, 나도 별 수 없는 ‘현실 엄마’였다. 끊임없이 전쟁과 평화가 반복되는 육아 일상에 지친 나는 ‘화’라는 용암을 언제 분출할지 모르는 활화산이 되기 일쑤였다. ‘참을 인자’를 머릿속에 되뇌며 참고 참고 또 참았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던가. 잔잔한 호수에 굳이 돌을 던져 물결을 일게 하듯, 아이들은 꿈틀거리는 내 속의 화를 기어코 세상 밖으로 소환해냈다.
‘이웃에게 피해 주는 행동은 절대 하지 말 것’ 아이가 셋이고 공동주택에 살다 보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특히나 층간 소음에 예민하기에 아이들이 쿵쿵거리면 내 심장도 쿵쾅거렸다. 엄마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막내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때면 일부러 발을 구르며 언제까지 참을 수 있겠냐는 듯 내 인내심을 테스트했다. 선을 넘는 행동은 내 안의 화를 돋우고, 더 이상 참아야 할 이유를 잊게 했으며 이성도 잃게 만들었다.
‘이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내가 이쯤에서 화내는 건 당연해.’라고 합리화한 후 그간 참아왔던 ‘화’까지 다 쏟아부었다. ‘화’라는 녀석은 한번 불이 붙자 멈출 줄 모르고 점점 더 커져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을 때면 그야말로 괴성을 지르며 헐크가 되었다. 아이의 죄송하다는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지 못한 채로 아이가 잠들기라도 하면 나는 밀려오는 자책감으로 눈물을 훔쳐야 했다. 내 불편한 마음을 떨쳐내려고 자는 아이를 깨우는 못난 엄마가 되기도 했다. “엄마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얼굴에 뽀뽀를 퍼부으며 아이가 잠결에 고개를 끄덕이면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생각해 보면 오후 내내 뛰어놀고 들어와 배도 고프고 졸릴 시간이었다. 종일 떨어져 지낸 엄마의 따뜻한 품이 그리워 투정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부모교육에서 배운 감정코칭이 떠올랐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며 꼭 안아주었더라면 끝났을 텐데, 나도 지쳐있었기에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때로는 나도 내 마음을 몰라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는데 하물며 이 작은 아이는 어떻겠는가. 서서히 이성과 감성이 차례로 제자리를 찾았다.
결국 ‘화’의 원인은 나에게 있었음을, 아이의 마음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읽어줘야 함을 깨닫는다. 내 마음이 온전하다면 갑자기 불쑥 찾아온 ‘화’라는 불청객도 지혜롭게 다룰 수 있을 텐데.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되겠다. 육아는 나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드러낸다. 헐크 같던 나의 ‘낯선 모습’이 일상이 되기 전에 '온유한 나'를 지켜야겠다. 오늘도 마음을 다스리며 내가 바라던 엄마의 모습에 한 발짝 다가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