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비켜섰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다시 불려간 하루
지난 화요일, 오랜만에 영산아트홀에 앉았다.
청주 출강일이라 꽤 긴 시간을 운전해 올라오던 날,
감사한 도전 하나가 툭— 하고 내 앞에 놓였다.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그래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섞인 채로 들어선 연주장은
지휘자와 합창단, 작곡가, 관객들의 열심이
공기처럼 가득 차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들,
관객석 한가운데 앉아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이제 이런 자리로부터
한 발쯤은 빠져나오는 중이 아닐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담담했다.
수요일은
여러 사람을 만나고 레슨을 하며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감기 기운 탓에 목소리는 점점 잠겨가고,
그날 쓸 수 있는 에너지는 거의 다 소진된 상태.
집에 돌아와 메일을 여는 순간,
전날 주어진 ‘감사한 도전’이
해야 할 일의 형태로 눈앞에 놓였다.
막연함은 사라지고, 도전은 구체가 되었다.
설렘, 두려움, 책임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료를 찾고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너무 피곤해져서
‘내일부터는 바짝 해야지.’
마음을 다잡고 있던 그때—
후배에게서 카톡이 왔다.
33년 전. 입시반주자로 처음 만났던
서울예고 교복 입은 고3 학생.
그 아이는 내 대학 후배가 되었고,
내가 반주하던 교회 성가대에서도 함께 활동했다.
유학을 다녀온 뒤에는
성악가이자 합창지휘자가 되어
입시 레슨과 대학 강의까지 하는
멋진 음악가로 성장했다.
그 후배가 지휘하는 합창단의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반주자가 일정이 맞지 않는다며
대타를 부탁해왔다.
거절하자 돌아온 말.
“정 안 되면 제가 피아노 치면서 연습시켜야죠…”
…지휘자가 피아노까지?
“그거보단 언니가 초견으로 치는 게 낫겠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내 발등을 스스로 찍고 있었다.
결국 “할게…”라고 답해버렸다.
곡은 18곡.
연주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너 왜 이래? 언니 이제 반주 안 한다니까
왜 이렇게 언니를 강하게 키우는 건데? ㅋㅋ”
라고 보냈더니
후배는 빵 터졌다고 한다.
웃긴 건 웃긴 거고,
나는 이미 수락 버튼을 눌러버린 뒤였다.
사실 걱정이 됐다.
예전엔 악보만 오면 뭐든 초견으로 쳐냈는데
요즘은 노안이 와서 그런지
초견이 예전 같지가 않다.
그래도
후배가 믿고 맡긴 일인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만은 분명했다.
문제는
그 18곡의 반주가 바로 다음 날, 목요일 일정이라는 사실!
그러나 악보를 미리 읽을 여유는
거의 없는 하루였다.
목요일 아침.
새로운 역할을 위해 자료를 찾다가
필라테스로 직행했다.(늘 불굴의 의지가 필요한 루틴이다.)
이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후배와 줌 레슨.
이 레슨은 늘 나를 다시 음악으로 숨 쉬게 한다.
잠깐 남은 틈에 악보를 펼쳐봤지만,
이건 짧은 연습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딱 그랬다.
시험을 앞두고,
어설프게 공부하면 오히려 더 헷갈리는 때.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은 순간.
결국 흐름만 눈으로 훑고 조용히 덮었다.
다시 컴퓨터 앞에서 일을 하다 시간이 되어
합창 연습이 있는 장소까지 제법 먼 거리를 운전해 갔다.
연습장에 들어서니
각자의 일상을 지켜가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단원들이 보였다.
그 모습이 참 좋았다.
예전엔 절대 쓰지 않던 돋보기안경도
오늘만큼은 꺼내 쓸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라는 게 정말 별 수 없다.
오랜만에 합창과 함께 피아노 앞에 앉으니
손가락이 “오랜만이야?”
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다행히 무난히 반주를 해냈고,
두 시간 넘게 초집중해서 치다 보니
허기가 갑자기 밀려왔다.
연습 내내 서서 지휘하던 후배는
고맙다, 미안하다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휴… 담주 공연 앞두고 런스루 연습 처음 했네요…”
“……뭐라고?
오늘 대타 반주자인 나랑 한 연습이 런스루 처음이라고?
너 나한테 왜 그래 진짜… ㅋㅋㅋ”
시립합창단 10년,
잠시 쉬고 다시 남성합창단 12년,
그리고 거의 1년 만의
두 시간짜리 런스루 반주.
잊고 있던 감각들이
하나둘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집에 가선
다시 새로운 일을 준비해야지
하는 마음이 잠깐 스쳤지만—
현실은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이렇게 또 글을 쓰며 드는 생각.
너나 나나,
이토록 여전히
젊은 날처럼 불안정하게,
또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살 일이긴 한가.
웃기다.
그런데 또 이런 나를,
이런 우리가
어쩐지 싫진 않은...
작년까지 반주를 맡았던 한국남성합창단의 정기연주회가 막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모교에서의 앙상블 연주를 앞두고, 흔치 않게 피아노가 일렬로 늘어선 풍경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