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위에 얹어 두었던 나의 노래
슬픔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괜찮다고 하기엔 무거운 하루였다.
제자의 아버지 부고를 듣고 새벽 발인을 다녀왔다.
허공을 바라보던 제자 어머니의 눈물 어린 눈이 자꾸 떠올랐다.
무엇보다 그 아이가 걱정되었다.
문득 6년 전, 엄마를 떠나보낸 뒤의 시간이 스쳤다.
그제야 알게 되었던 마음들.
아, 엄마도 이런 순간을 지나셨겠구나.
나는 이렇게 힘든데, 저 아이는 얼마나 긴 시간을 건너야 할까.
하루는 예정대로 흘러갔다.
레슨을 하고, 후배들을 만나 웃고, 공연장으로 이동했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었다.
피아니스트는 니콜라이 루간스키.
연주는 놀랍도록 훌륭했고, 편안했고, 충분히 아름다웠다.
지휘자는 루바토에 맞춰 조심스레 호흡을 맞추었고, 흐트러짐은 없었다.
너무 좋았다.
그런데 어딘가...
피아니스트는 감성에 잠기기보다는
감성을 또렷이 표현하되 끝까지 이성을 놓지 않는 연주를 하고 있었고,
오케스트라는 그가 마음껏 헤쳐 나갈 강물이 되기보다는
그의 발걸음에 조심스레 보폭을 맞추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웠지만 깊이 젖어들지는 못했다.
집에 돌아와 내가 듣고 싶은 쇼팽을 찾았다.
조성진의 연주를 듣고,
이어 크리스티안 짐머만과 여러 연주자들의 해석을 찾아 들었다.
아니었다.
내 귀에 익은 그 터치와 루바토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문득 알았다.
오늘 나는 많이 슬펐다는 것을.
그래서 어떤 연주도 내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아침에 다시 몇 연주를 더 들으며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찾고 있던 연주는, 나의 것이었다는 것을.
서른 후반, 마흔 즈음.
마음이 동할 때마다 이 곡을 꺼냈다.
어려운 패시지는 건너뛰고, 손에 닿는 부분만 ‘쓰윽’ 치며.
특히 2악장을 좋아했지만 끝까지 완성해 본 적은 없었다.
그때 나는 늘 바빴다.
연습도, 완성도 없었지만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나의 방식으로 이 곡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던 쇼팽은 대가들의 연주가 아니라 마음이 힘들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 건반 위에 얹어 두었던 나의 노래였다.
잘 쳤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가장 나답게 흘렀던 음악이었다.
그래서 내 귀와 몸에 깊이 스며 있었던 것이다.
쇼팽의 음악은
닿을 듯 말 듯한 실크의 결 같다.
실오라기 하나 겨우 스며들 틈.
넘칠 듯 말 듯, 미세하게 출렁이는 물.
어제와 오늘,
그 물결 위에
내 슬픔과 오래 전의 내가 함께 얹혀 있었다.
핸드폰으로 그냥 쓰윽 그려본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