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취미가 무엇인가요? - 바이올린
자신이 궁금하다면 십문십답
나에게는 쓸데없고 신기한 능력이 있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악보 없이 대충 악기로 연주할 수 있다.(대충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모든 음을 다 연주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주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 또 이 멜로디를 다장조로 옮겨서 연주할 수도 있다. 어설픈 청음, 어설픈 상대음감이다. 음악 연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우와~! 하고 놀라지만 음악 전공자에 비하면 하찮은 능력이다.
나는 유치원에 가기도 전에 무슨 노래만 들으면 피아노 치는 흉내를 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이 모습이 귀엽고 신기했던지 7살 크리스마스 선물로 업라이트 피아노를 선물해 주셨다. 나는 알고 있는 노래를 떠듬떠듬 피아노로 치기 시작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계이름을 몰랐지만 이 건반을 누르면 이 소리가 나고, 저 건반을 누르면 저 소리가 나는 걸 알게 되었다. 악보를 모르지만 내가 아는 노래는 이렇게 이렇게 누르면 칠 수 있는 것이었다.
8살 때 피아노 학원에 갔다. 그런데 나는 피아노를 배우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친구들이 치는 소리를 들으며 피아노 학원에 있는 책만 읽었다. 결국 선생님은 피아노가 정말 치고 싶을 때 오라고 하셨고 나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전혀 슬프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내가 치고 싶은 곡은 대충 오른손으로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동생 집에 놀러 갔는데 동생이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었다. 바이올린에는 3개의 흰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고, 4개의 줄이 있었다. 동생이 낑깡낑깡 켜는 것을 보니 이 줄에서 요런 요런 요런 소리가 나고, 저 줄에서 저런 저런 저런 소리가 난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다. 그날 바로 바이올린으로 나비야를 연주해 보았다. 첫날이지만 그 동생만큼 연주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바이올린이 배우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당시 바이올린은 너무 비싼 악기였다. 지금도 연습용 바이올린은 20~30만 원인데 당시에도 연습용 악기가 10만 원 이상이었던 것 같다. (30년의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엄청 비싼 악기였다) 그리고 바이올린 레슨비가 많이 비쌌다. 엄마는 주저주저하더니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집 형편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는 건 무리였던 것이다.
바이올린은 배우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피아노가 치고 싶을 때 내 마음대로 쳤다. 만화주제곡이나 동요를 쳤다. 5학년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바이엘부터 체르니 30번 초반까지 1년 만에 끝냈다. 코드를 보는 법도 배워서 내가 알고 있는 곡은 양손 연주가 가능하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학교에 오케스트라가 있었다. 이 오케스트라는 성적이 좋거나 현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학생들을 선발했는데 나는 성적이 좋은 편이어서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부모님은 당장 바이올린을 사주셨고, 나는 2학년 선배에게 바이올린 켜는 법을 대충 배웠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매일 3교시 쉬는 시간에 점심을 먹고 점심시간이 되면 바로 음악실에 가서 바이올린을 연습했다. 이렇게 바이올린에 익숙해지니 내 마음에 들었던 가요나 영화 음악 같은 곡을 악보 없이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바이올린을 연습할수록 악기의 음을 낼 줄 안다고 해서 그것이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아노는 건반을 누르면 (조율만 되어 있다면) 어떻게 누르던 그 음이 난다. 하지만 현악기는 현을 누르는 왼손가락의 위치가 조금만 달라져도 음이 완전히 틀리게 된다. 정확한 운지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늘 신경을 써서 연습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나 혼자는 알기 힘들어서 레슨이 절실했다. 부모님과 협상을 했다. 나는 사교육을 받지 않고 있으니 중간고사에서 평균 95점이 넘으면 바이올린 레슨을 받게 해달라고 했다. 나는 정말 그 성적을 만들어냈고, 드디어 바이올린 레슨을 받게 되었다. 선생님은 음악마다의 분위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어깨와 손목에 힘을 빼고 음악을 느끼며 연주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선생님과 함께 레슨을 하니 소리가 많이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고 전공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때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3~4살부터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그녀를 보니 내가 지금부터 음악을 아주 열심히 해도 장영주처럼 세계를 감동시킬 음악가는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부모님도 내가 음악 전공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3개월 동안만 레슨을 받고 그만두었다. 취미로만 바이올린을 연주할 거면 레슨을 계속 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레슨은 그만두었지만 바이올린은 계속 연습했다. 스즈키 3권, 4권, 5권, 6권. 음악이 고파질 때마다 스스로 진도를 나가고 소리를 다듬으며 연습을 했다. 중고등학생 때에도, 대학에 가서도, 직장을 다니면서도, 결혼을 하고 나서도 혼자서 계속 연습을 했다. 때로는 문화센터에 등록을 해서 잘 안 되는 부분을 선생님께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좋은 노래가 있으면 노래방 반주를 틀어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기도 하고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활동도 하고 성당 성가대 반주를 하기도 했다.
전공자의 실력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지금도 바이올린을 연습한다. 더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서, 내 만족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