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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작북작 Feb 09. 2024

8. 좋았던 선물은? - 그림, 잠, 나만의 시간

내가 궁금하다면 십문십답

한국 나이로 29살 내 생일. 나는 20대의 마지막 생일에 자신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때 나는 갤러리가 있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갤러리에서는 남희조 작가의 전시를 하고 있었다. 매일 갤러리에서 그림을 보니 나도 한번쯤은 그림을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갤러리에서 남희조 작가님을 만났다. 작가님과 인사를 나누고 그림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작가님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작가님은 20대 반에 결혼을 해서 연년생 아들을 낳으셨다.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이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사업이 잘 풀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에서 소소하게 미술을 가르치면서 벌이를 하셨다. 남편의 사업은 점점 잘 되었고 연년생 아들은 자기 앞가림을 할 만큼 컸다. 그리고 작가님은 40대에 뉴욕 프렛대학에서 학사 석사를 하셨고, 그 뒤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계셨다.      


이런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작가님의 인생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웠던 시기를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이겨내는 현명함, 40대의 나이에 명문으로 꼽히는 프렛대학교를 졸업하는 도전정신. 그리고 그림에 대한 열정. 이 모든 가치를 내재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림을 사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구입한 그림의 반은 어둠으로 덮여 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은 주황색이 감싸고 있다. 어둠이 오고 있지만 여전히 주황도 물러설 기미가 없다. 해가 떠오르는 도시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둠이 내리는 도시 같기도 하다. 밝음을 잡아먹는 어둠 같기도 하고, 어둠을 잡아먹는 빛 같기도 다. 주황 쪽은 두껍게 칠해졌고, 검은 쪽의 가장자리는 수묵화처럼 얇은 느낌이다.     


그림 속의 어둠은 세상이 나에게 친절하지만은 않다는 뜻으로, 두껍게 칠해진 주황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다는 의미로 느껴졌다. 그리고 날마다 자기 긍정과 자기부정으로 엎치락 덮치락 하는 내 마음 같기도 했다.      


내 월급보다 더 비싼 그림을 나에게 선물했다.  이 일로 작가님과 매년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고, 작가의 꿈을 꾸게 되었다. 이 그림을 사서 (어떤 작가가 될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작가가 될 거라는 꿈을 꾸게 되었다.     





/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다. 내 아이는 너무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아이가 100일이 될 때까지 나는 누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너무 울어서 24시간 안고 있어야 했다. 100일 뒤에도 아이는 새벽마다 몇 번씩 깨서 울었다. 아이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이의 첫 생일쯤 둘째가 생겼고 목소리가 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나오지 않더니 둘째 출산 때에는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았다. 둘째 출산 뒤에 유명하다는 이비인후과를 다녔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 조직 검사를 했는데, 단지 목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이 안 좋은 상태라고 밝혀졌다. 20개월 차이의 아기 둘을 기르며 건강을 챙기기는 쉽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대학병원에 가서 상태를 살폈고,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입퇴원을 반복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잠이었다. 친정에 가면 부모님은 내가 잠시라도 눈을 붙일 수 있게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시부모님도 내가 쉴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언니도 내가 피곤해하면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쉴 수 있게 해 줬다. 남편도 아이들에게 게임을 시켜줄지언정 내가 잘 수 있게 해 주었다.  

    

(상상해 보시라. 시댁에서 시어머니는 밥 하시고 시아버지는 아기를 보시는데 며느리는 자고 있음. 어떤 집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일 텐데, 시부모님이 좋으셔서 나는 시댁에서도 뻔뻔하게도 잘 잤다. 친정에서도. 그리고 남편이 집에 있는 휴일에는 집에서도. 그렇게 건강을 회복했다)     


그때의 잠, 참 감사한 선물이다.           



/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나이가 되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면 그때부터 오전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다. 세탁기를 돌리고 정리를 하고 청소기를 대충 돌린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식당에 있는 6인용 테이블에 앉는다. 책을 읽고 독서록을 쓴다. 필사도 하고 일기도 쓴다.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쓰기도 한다. 이렇게 할 일을 하고 있으면 고양이가 테이블에 올라와서 내 손에 얼굴을 비빈다. 간식을 달라고 발랑 누우며 가르랑 거린다. 고양이가 골골거리는 소리와 부드러운 털,  사랑스러운 애교에 행복하다.  

   

거실에 가서 피아노 뚜껑을 연다. 어릴 때 좋아했던 소나티네 악보를 펼친다. 어릴 때는 강약 조절을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멜로디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선생님이 연필로 치는 박자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급하게 치다 보면 손가락이 날아가고 박자가 무너지곤  했었다.


악보를 앞에 두고 나의 템포대로 천천히 피아노를 친다. 강약을 살리면 어떤 느낌인지, 멜로디를 마음속으로 불러보며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말을 한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아가고 있다. 내 손은 예쁜 소리를 낼 수 없는 불구 같은 손인 줄 알았는데, 천천히 계속 연습해 보니 나도 깨끗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금씩 템포를 높여보기도 한다. 템포를 올리면 박자가 잘 무너진다. 잘 안 되는 부분을 신경 쓰면서 연습하다 보면 점점 괜찮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조금씩 발전하는 이 시간, 나에게는 선물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 시간을 통해서 돈도 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하지 않은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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