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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연 Apr 19. 2023

애완, 반려

의인화 되는 사물

나는 개나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공간적, 물리적, 생태적, 이성적, 감각적, 감성적...등 온갗 적..적..적을 다 끌어와야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아예 시작을 하고 싶지 않다.  요즘처럼 개나 고양이의 사진과 동영상이 SNS나 방송매체에 차고도 넘치는 세상에 조막만한 강아지라도 키워야 세상의 트랜드에 맞출 수 있을텐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

딸들은 개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온통 고양이 케릭터들이 책상위에 도배되어 있고 고양이에 관한 유투브를 정말이지 재미있어 한다.

내가봐도 귀엽긴 무척 귀엽다. 당장 한마리 데려다가 키워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럴때일수록 나의 이성은 이를 거부하게 만든다.

우선, 보편적으로 개는 나보다 더 일찍 죽는다는 사실이다.

개라는 동물의 수명과 관계되는 말이다.  언젠가 동물병원을 지나는데 젊은 모녀가 나오면서 대성통곡을 하는걸 보았다. 직감적으로 키우던 개나 고양이에게 안좋은 일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부모가 죽었을때도 저렇게 슬프게 울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돌아섰는데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오래 지속되었다

나는 이 현상을 인연이란 단어와 일치시키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면 살면서 인연을 만들기는 마음 먹기에 따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인연이란 인간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나 아닌 타와의 관계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들을 시간이라는 연결고리로 이어놓으면 그게 인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삶의 단편들은 무엇을 만나고 헤어짐으로 만들어지고 이런 단편들이 엮어져서 인생이란 거창한 단어로 귀결된다고 본다. 그렇기에 인연이란 아무렇게 만들 것이 아닌 소중히 생각해야 할 일이다.

나는 사람과의 인연을 만들고 정리하기에도 빠듯한데 동물과의 연을 만들고 끝낼 재간이 없다. 이게 동물을 키우지 않는 이유다.

말했듯이 내가 보편적인 수명을 산다면 지금 강아지 한마리를 키우기 시작해도 강아지가 먼저 는다. 그때 내가 느낄 실감과 슬픔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무도 끔찍할 것 같다.  어쩌면 질긴 인연의 죽음로 인하여 마음속 깊은 내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키우던 동물을 위해 화장시설을 찾고 심지어 동물 추모시설도 있다고 들었다.  이러한 것들도 따지고 보면 내가 치유받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나에 의해서 어진 인연을 끝낸다는 것은 고통이고 슬픔이다.  젊었을 시절에는 하나의 인연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서 분주히 쫒아다닌다. 그러나 인생을 마감하는 시기가 오면 그동안 애지중지했던 인연들을 하나 둘 정리하고 마침내 나라는 존재와도 작별하며 삶을 끝낸다.


동물을 키우지 않는 또다른 이유는,  나는 태생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이다.

어느 개 훈련사는 세상에는 나쁜개는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개의 나쁜 습성은 개의 주인, 즉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좁은 집안에 가두어 키우면서 매일 산책도 안시키는 견주를 어느 유명한 개 훈련사분이 나무라는 걸 TV에서  적이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개는 하루 두번, 적어도 한번이라도 데리고 가서 산책을 시켜줘야 한단다. 그리고 개가 배변을 하면 비닐봉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아직 식지도 않아 온기가 느껴지는 그걸 손으로 치우고 변봉지를 달랑거리며 집에까지 가지고 와서 처리를 해야 한다. 집안에서 줌이라도 싼다면 휴지로 닦아주고 걸레로 여러번을 닦아야 하는 수고로움, 털이 날리면 수시로 청소기를 돌리고 내옷에 붙은 털들과 전쟁을 해야한다.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그런 관심과 희생을 해주었으면 좋겠지만, 오직 내 즐거움을 위해서 키우는 동물을 위해서 그런 희생까지 할 용기가 나지않는다. 내 즐거움이 아니라 개의 즐거움을  위해 내가 사는 것 같은, 주객이 뒤바꿘 것 같다.

나는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동물을 키우고 싶을 따름이지 동물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이러한 엄청난 수고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기에 나는 너무나도 게으르다.


집에서 키우는 동물과 오래 살게되면 동물이 식구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반려동물이란 표현을 쓰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반려자라고는 하지만 동물을 반려견, 반려묘로 생각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사람에게서 반려의 의미를 찾고 싶다. 내가 동물에게서  반려의 의미를 느낀다면 내자신이 너무 불쌍해 보일 것 같다.   나보다 .개나 고양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평생을 개나 고양이를 그리워하고 슬퍼해야 한다. 나는 그럴 자신이 정말이지 없다.

애완이든 반려든 가족이든 명칭이야 다 좋다. 그러나 동물에게는 동물답게 대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동물에게서 사람의 향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집에서 기르는 동물은 태생적으로 귀여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것으로 인간으로부터 음식을 얻고  생명을 이어나간다.

강아지 훈련사는 어떠한 행동을 가르칠때 반드시 먹을 것을 반복적으로 주는 것을 보았다.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를 이용한 철저한 사람위주의 교육이다. 그렇게 나에게 개를 맞추고 를 즐겁게 한다. 동물을 키우는 것이 즐겁지 않으면 동물을 키울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외로움을 타는  동물이다.

그래서 사회를 만들고 종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거대한 바위나 돌, 심지어 동물이나 사물에 인간의 감성을 덧씌운다. 무엇엔가 집중을 하고, 모으고, 그것과 대화를 하며 외로움을 해소하고자 한다. 그래서 취미라는 것도 생기나 보다.

동물과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본다. 심지어는 스스로 동물의 아빠, 엄마가 된다. 동물이 바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앙증맞은 옷을 입히고 유모차에 태워서 다니기도 한다.

인간이 동물이나 사물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중 하나는 그것이 사람이라는 주관적인 착각을 하는 것이다. 개나 고양이의 주인은 하나같이 자기의 말을 그들이 알아듣는다고 착각을 하는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사물에 대한 의인화이다. 잠시 그것이 사물이 아닌 인간이란 착각을 하게 된  것이다.

왜일까?

이 또한 인간이 외롭기 때문이다. 산업화가 심화되고 기계로부터 인간이 소외되어 갈수록 이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애완동물과 관련된 산업은 더욱 규모를 더할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서 애를 쓴다.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이다.


강아지 한마리를 키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아파트가 아닌 푸른 잔디가 있는 마당이 넓은 집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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