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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연 Apr 18. 2023

외로움

늙는다는 것은 외로움의 시작이다.

쉬는 날이면 의례이 아내와  나는 신도시에 마련된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한다. 이를 아는 지인들 중에서는 내가 참 열심히 산다고 하고 부지런하다고 말하며 모범적으로 산다고 칭찬 해준다. 육십이 넘어서 팔굽혀펴기를 사십번은 거뜬히 하는 걸 보고 혀를 내두르는 젊은 후배들도 있다.

정말로 내가 열심히 살고 부지런하며 모범적인가?

남들이 나를 보고 판단하는것 보다는 내자신이 나를 잘 알고 있으므로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아니다. 나는 지금껏 살며 열심히 살아본 적이 없다. 나는 태생적으로 게으르다.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모범적이지 못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토록 귀찮고 힘든 운동을 계속 하는가?

두렵기 때문이다.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렸다. 체육관에 가다가 치명적인 감성은 잔꾀로 변질되었다. 비가 오는 이날에도 힘든 기구들과 씨름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내를 꼬드겨 신도시호수를 한바퀴 돌자고 제안했다. 아내도 왠일인지 선뜩 동의했다.

12,000보,  돌고 보니 뒷다리가 다소 뻐근했다. 이대로 또다시 걸어서 집에 가고자 하니 몹시 귀찮았다. 거기다가 내리던 비도 그치고   뒤의 따가운 햇살이 화살처럼 내 피부를 뚫을듯 했다. 무거운 걸음으로 다리교각 아래를 지나치는데 조그마한 벤치에 나이드신 아주머니 한분이 앉아 계셨다. 누가봐도 칠십은 넘으실 것 같았다.  노인들이 교복처럼 입으시는 조끼에 다소 짧은 치마. 그리고 작은 천으로 만든 손가방을 드신 모습은 아주 평범해 보였다. 길목 벤치에서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듯 주시하시던 그 노인께서 지나가는 나를 발견하시고 말이 아닌 손짓으로 급하게 나를 부르셨다.  왜 나를 부르실까? 혹시 사이비종교를 전하려는건 아닐까? 아니면 몸이 갑자기 안좋아져서 도와달라는 것은 아닐까?

찰나의 순간에 여러가지 가설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 노인께서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언어능력을 잃어버리셨는지 말은 하지 않으시고 조그마한 천가방에 손을 넣으시더니 사탕 한 줌을 꺼내서 나에게 건내셨다. 받아주면 좋겠다는 간절한 표정과 함께....

뭐지, 혹시 마약성분이 있는건 아닌가? 독이 든건 아닌가?  스치는 이런 생각뒤에는 이런 불손한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느껴졌다.

어떨결에 받아들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 돌아서 오면서 참으로 많은 상념이 교차했다.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 한다는 것. 사람을 느낀다는 것. 사람과 소통한다는 것.

나는 이 명제를 늙는다는 것과 연결지워 보았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자라나장성해 나간다. 그리고 사람을 잃으며 늙어간다. 그동안 만나서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을 완전히 정리하는 순간이 죽는 때이다. 그래서 늙어간다는 것은 세상과 헤어짐을 준비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의연해야하고 용기 있어야 하고 진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동안 마지막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혼자해야 한다. 몸을 써야 하는 것이라면 남의 도움을 청할 수 있겠으나 그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혼자해야 한다. 그 결정들은 지금껏 살아온 모든 과정에서 성찰된 요소들의 집합이며 철학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외로운 과정인 것이다.

 

그 노인은 분명 사탕을 파는 분은 아니셨다. 또한 부자여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탕을 나누는 것을 업으로 하시는 분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귀한 사탕을 나누어 주는건가. 분명 아들이나 며느리로 부터 받은 얼마되지않는 용돈으로 샀을텐데. 나는 그 의도가 궁금했다.

혹시 누군가와의 소통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탕을 전하는 그 짧은 시간만큼이나마 사람의 냄새를 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 노인은 늙음을 준비하는 과정과정에서 잠시라도 사람과의 대화가 주는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자식들을 훈육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생활터전에서 뒤쳐지지 않기위해 고래고래 악을 쓰며 살아왔을 그분은 왜 말을 잃으셨을까? 이제 더이상 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만큼 내면과의 대화에 집중하는건  아닐까? 거기서 어둠같은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건 아닐까? 아니면 어떤 이유로  말을 잊을만큼 배신당하고 상처를 받은건 아닐까?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도태시키고 작은 울타리를 만들어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서 언어라는 수단을 차단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안에서 죽음보다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늙어감은 외로움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면 너무 큰 과장일까?


나는 무섭다.

늙어간다는 것이, 외로워지는 것이,  그리고 홀로 그 무게를 오롯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운동을 하고, 운동을 한 후 거울에 비친 작은 근육의 변화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은 그 노인이 사탕 한줌을 건내는 순간에 사람을 바라듯이 나도 그 순간에 내가 느낄 외로움을 조금 내려놓고 싶기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더 외롭게 한다.

외로움이란 인간이 만들어놓은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람과의 관계적 결손이 낳은 정신적인 압박이다. 때로는 이로 말미암아 정신적인 질환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스스로 생을 중단하는 극단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동안 세상으로 부터 배운 많은 도구들과 에너지로 이에 맞서며 산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조용한 방법으로 외로움을 잊게 되고 생을 마감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적인 과정이다.


그 노인과 몇마디 이야기를 해볼걸...

호박 카라멜.

차마 입에 넣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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