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짝퉁, 태생적인 열등감

by 김지민

2026년 4월 20일 >>>


나는 아침에 입었던 추리닝 그대로 밤에 자는 일이 많다. 잠결에 덥거나 갑갑하면 그제서야 꼼질꼼질 발가락으로 밀어 내린다. 안 그러면 그 추리닝 바람으로 다시 일어나 일도 하고 외출도 한다. 단, 교회나 예식장 등에 갈 때만 아내가 챙겨 주는 옷을 입는다. 반면에 아내는 옷차림에 꽤 신경을 쓴다. 잠시 어딜 나가도 거울이 닳도록 아래위/앞뒤/좌우로 살핀다. “명품은 아무렇게나 하나 툭 걸쳐도 다 잘 어울리는데......” 하며, 하하, 가끔은 은근히 내 탓을 하기도 한다.


헌 옷 한 보따리 들고 수선집에 들어간 아내를 하염없이 차에서 기다린 것이 평생 수십 번이다. 새 옷이나 신발, 액세서리 등을 보러, 사러, 교환/반품/가격조정 하러 갈 때 따라간 것은 수백 번이다. 길가나 주차장의 차 안에서, 벤치에서, 카페에서, 백화점 휴게 공간에서...... 잡혔다 놓인 물고기처럼 한 번 사라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영겁(永劫)의 기다림...... 혹 어디 “쇼핑 망부석(望婦石)” 같은 것이 세워진다면, 필히 내 이름이 맨 위에 와야 한다.


기다림은 힘들어도, 나는 쇼핑의 절대 찬양자다. 갈 때마다 아내에게 “내 걱정 말고 실컷 보고 오라” 한다. 그것만큼 아내를 즐겁고 생기 있게 해 주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 딸네에서 주야로 봉사, 시들시들 다 죽어 가다가도, 쇼핑만 가면 아내는 부활한다. 발걸음, 손놀림, 눈빛, 표정, 음성, 자신감. 모든 것이 살아난다. 쇼핑 끝무렵 양손 가득한 종이백, 그 속에 든 것들은 다 “신비의 명약”이 틀림없다. 아니면 초주검이던 사람이 만면에 희색 가득, 어찌 그리 금세 펄펄 살아나나?


가고 또 가고, 보고 또 보고...... 그렇게 부지런을 떠는 덕에 아내는 젊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최근에 만난 어떤 분은, “나이가 전혀 가늠이 안 됩니다”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평소 아내를 늘 보는 우리 동네 우체부는, 어느 날 내가 문을 열자 너무 자신 있게 “차경희 씨 아버님이시죠?” 하며 소포를 턱 안기고 갔다. 13~4년 전 e-편한에 살 때는, 둘이 나이 차이가 커 보이는 것이 “내연의 관계”가 틀림없다는 소문도 돌았다고 한다. (하하, 우린 동갑이다.)


나는 매 3~4년 컴퓨터 교체한 것 외엔 평생 뭘 딱히 산 것이 없다. 이건 내 말이 아니고 아내가 사람들한테 하는 말이다. 그 외의 물건들은 --- 내가 반대하든 말든 --- 아내가 다 샀다. 아내는 가히 “쇼핑의 여왕”. 내 것이든 자기 것이든 꼭 필요한 것, 편리한 것, 예쁜 것,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은 세상 어느 구석에 숨은 것도 다 찾아내 산다. 온라인 쇼핑의 시대, 아내는 인터넷 서치를 얼마나 잘하면 교회 청년들조차 가끔 자문을 구한다. 배송 완료든 반품이든, 우리집 앞엔 소포가 없는 날이 없다.


그런데 이 쇼핑과 관련, 뼈아픈 깨달음이 최근에 하나 있었다. 미국 오면 유일한 나들이가 4~50분 차 몰고 가끔 쇼핑몰 가는 것. 그날도 평소처럼 몰(mall)로 진입하던 중, 무심코 내가 물었다.

“여보, 옛날에는 색스피프쓰(Saks Fifth), 니만마크스(Neiman Marcus) 같은 데도 차를 세웠던 것 같은데...... 요새는 왜 그런 매장들 앞에 주차하라는 말을 통 안 하노?”

그랬더니 아내 왈, 여태 그걸 몰랐나, 그런 데는 가격 맨 끝에 영(0)이 하나 더 붙는 명품만 판다, 옛날에 당신 잘나갈 때나 한 번씩 갔던 거다, 지금은 가긴커녕 쳐다도 못 본다, 하는 것이었다.


어른들 놀이동산 정도로만 여겼던 쇼핑몰에, 그런 무서운 등급/차별이 있었을 줄이야! 그 말을 듣고 아내를 내려 주고 차에 앉아 있자니 코끝이 짠해 왔다.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하는데, 정작 아내는 “진짜 욕망”은 애써 외면한 채 허구한 날 “세일(sale)”만 쫓아다니는 게 아닌가...... 나는 왜 그것도 몰랐을까...... 하기야 알았어도 달리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지...... 아, 그 욕심에 얼마나 그런 명품점들이 가고 싶을까...... 여자들은 있으나 없으나 젊으나 늙으나 왜 하나같이 명품을 좋아할까......


그러고 있던 중, 문득 뭔가가 번쩍했다. 그리곤 지난 일들이 갑자기 다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우리가 e-편한에 월세 반/전세 반 살 때, 아내는 한동안 짝퉁 가방에 심취했었다. 그땐 그저 재미로 저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건 참으로 기발한 발상! 내가 소위 “잘나갈” 때 맛봤던 명품의 그 짜릿함. 그런 명품은 이제 엄두도 못 낸다는 시린 상실감. 이 두 극한을 천재적으로 잘 조화시킨 아내는

“명품이 안 되면 최고의 짝퉁을!”

을 그녀의 새 목표로 삼았던 것이었다.


그 뒤 한 1년, 아내는 틈만 나면 인터넷을 뒤지고 전화를 돌리며 짝퉁을 “연구”했다. 가죽의 종류, 질, 원가, 주요 짝퉁 생산국, 생산지, 판매 경로, 짝퉁의 기술, 등급, 가격 체계...... 이만큼 짝퉁 가방에 대해 빠삭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내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결국 “거의 진품 같은 짝퉁 제작자”를 찾아내 짝퉁치곤 꽤 비싼 가방 두 개를 샀다. 가격 대비 매우 만족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더 개선은 안 되느냐는 아내의 질문에, 그 사람 대답이 걸작이었다.

“짝퉁은 태생적인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 이상 더는 안 됩니다.”


또 한 번 쇼핑을 갈 때가 됐다. 가면 우리는 크게 말이 필요 없다. 각자 자기 잘하는 것을 --- 아내는 사는 것을, 나는 안 사는 것을 --- 하면 된다. 그래도 나는 그런 무료함이 싫지 않다. 맘속에 한결같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루이비통, 샤넬, 에르메스가 모두 열등감을 느끼는, 단연 최고 명품(名品). 사람들이 제일로 치는 명품들이 그 앞에선 초라한 짝퉁이 되는, 세상 유일한 명품. 그 명품이 늘 아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 아내 책꽂이 한켠에 뽀얗게 먼지 앉은 책. 그 성경책의 주옥같은 명언(名言)들이 까탈스러운 아내의 눈길을 끄는 날이 속히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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