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의 아들 교룡을 꿈꾸다

나는 "개룡남"이다

by 김정선

김정선 (서울시 전문서기관)

*『높이 오르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이유』(2025.1.出,, 북랩) 저자


이 글은 한 공무원의 개인 성장기가 아니다.

한 편벽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어떻게 공공의 윤리를 품은 행정가로 자라났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리고 그 바탕엔 언제나, 고요하지만 깊은 그림자처럼 교룡산(蛟龍山)이 있었다.


꿈의 기슭, 교룡산 아래서

내가 자란 고향 마을 뒤편엔 ‘교룡산’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 산에서 작은 모험을 했고, 어른들은 땔감과 삶의 무게를 함께 지고 올랐다.

하지만 내게 그 산은, 언젠가 세상으로 날아오르고 싶은 꿈의 기슭이었다.

눈내리는 교룡산.png

그래서 나는, 교룡(蛟龍)을 꿈꿨다.


“나는 어린 시절, 논두렁 밭두렁을 뛰어다녔습니다.

아버지는 허리가 휘도록 일했고, 어머니는 해가 저물어도 호미를 놓지 않으셨죠.

그런 집에서 자란 나는, 지금 서울시에서 ‘공무원’으로 살아갑니다.”


“농부의 아들”이라는 태생적 사실이 나의 공무원 생활의 큰 틀을 규정하는 데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궁핍했던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과정에서, 보고 배운 것이 어렵게 살아가는 농부들의 힘겨운 삶의 방식이요, 도시와 비교하여 폐쇄적인 농촌지역의 전원적 삶의 방식이다.


궁핍한 상황에서도 자식들 교육시키느라 논밭에서 밤낮으로 일하면서 휘어버린 허리와 등을 가진 부모님을 보면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된 가치관이나 생활신조가 나의 공무원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나의 두 아들은 농부인 할아버지, 공무원인 나를 기반으로 해서 더욱 깊이 있고 융통성 있는 사고체계를 형성하여 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자신의 잠재 역량을 발휘하면서 멋진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


어려웠던 시절의 고단한 삶

나는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초까지 남원의 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녔다. 당시만 해도 농촌 경제 사정이 매우 궁핍하여 농민들의 삶의 질이라는 것이 형편없었다.


그런 이유로 상당수의 농촌 태생 학생들은 학교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름철 농번기에 가끔 목도했던 웃지 못할 씁쓸한 에피소드를 예로 들면, 남루한 옷차림의 촌로 한 분이 학교 수업 중임에도 불구하고 교실로 불쑥 들어와서는 수업 중인 교사와 학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서, 한 학생을 끌고 나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야, 이놈아! 농사일로 바빠죽겠는데, 공부는 무슨 공부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농번기에 가끔 목도했던 장면 중의 하나였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궁벽한 농촌의 가정 상황에서 학교에 매달 납부해야 할 50원이나 100원 정도 되는 “월사금(月謝金, 수업료)”으로 줄 돈이 없어서 부자간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볼썽사나운 모습들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아침 등굣길에, 어린아이가 부친에게 월사금 납부하게 돈 달라고 울면서 애원하면, 그 부친은 “돈이 어딨냐”, “학교 다니지 말아라” 등등의 부모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쏟아내기도 하였다.


물론, 나야 이런 경험을 겪지는 않았지만, 당시만 해도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농촌의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마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조국 현대화 과정, 어린 소녀들의 희생

일부 여자아이들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로, 부산이나 마산으로 아니면 안양이나 서울로 가서 힘겹게 공장을 다니면서, 돈 벌어서 고향으로 송금하여 어린 동생들이 공부할 수 있게 지원을 하거나 부모들의 생활비를 보태기도 하였다. 그들의 희생이 있어 산업화와 농촌경제 활성화가 가능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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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경제개발계획의 기본 방향이 농촌의 희생을 통해 도시의 경제발전을 이뤄내고 그 이익을 골고루 누리자고 하는 것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도·농간 소득격차는 더 많이 벌어지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농촌의 경제 여건은 상당히 피폐한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일부 어른들은 농한기에는 할 일이 없어서 노름이나 음주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비민주적인 가족문화 등으로 인해 가족 구성원 간의 불화와 다툼이 매우 잦았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농번기에는 서로 품앗이로 부족한 일손을 보탰으며, 가정이나 마을의 대소사를 십시일반으로 서로 도와가며 해결하는 아름답고 훈훈한 정을 서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80년대와 90년대의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던 “전원일기”와 같은 그런 휴머니즘적인 전원 풍경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가난 속에 피어난 교육의 열망, 도시로의 유학

농촌 생활 여건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공부깨나 하는 나는 농촌을 떠나고픈 열망이 강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부모님이 일하고 있는 논밭으로 가서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농촌 학생이 그러했다. 주말에는 하루 종일 부모님을 도와 논과 밭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특히 여름철 농번기에는 모내기하느라 부모님과 함께 새벽별 보고 집을 나가 저녁별 보면서 집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런 환경에서 어린아이들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한다. 대부분은 그 지역의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적당히 공부하고 졸업하여 돈 버는 길로 들어서든가, 아니면 일부 공부깨나 하는 아이들은 전주나 순천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 하여 농촌을 떠나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공부깨나 하는 편이어서 부친께 전주로 유학 가고싶다는 말씀을 드려서, 허락을 받아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당시 부친의 현명하신 결정 덕분에 내가 서울시청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할 수 있는 인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전주로 유학하면서, 주말마다 시외버스를 타고 남원과 전주를 오가면서 여러 사회 문제들도 대면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택배 서비스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때라 오갈 때마다 무거운 쌀 포대, 김치 통과 밑반찬을 어깨에 메고 두 손에 들고 다녀야만 했다.


그 과정에 육체적 단련은 많이 되었지만, 버스기사나 택시 기사 등으로부터 받아야만 했던 스트레스도 꽤나 많았었다. 그때는 김치 통에서 왜 그렇게 김칫국물이 자주 샜었던지! 그럴 때마다 운전기사들로부터 내가 들어야 했던 핀잔은 왜 그렇게 듣기 싫었었던지!


그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어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행태가 만연해 있었다. 실생활 분야에서도 나름의 비공식적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세력들이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버스 기사들도 나이 어린 승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억압 속에서 정의감을 품다

그 외 산감(山監)과 관련한 에피소드 역시 당시 막강했던 “산림감시원”의 권한이 얼마나 많은 농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데, 나에게 올바른 행정권한 행사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당시 정부에서는 산림보호를 위해 농민들이 산에서 땔감을 채취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공무원이 바로 “산감(산림감시원)”이었는데,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는 ‘산감’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TV 사극에 나오는 ‘상감’으로 오해한 것도 같다.


‘산감’이 떴다는 말만 들어도 다들 무서워서 산속으로 깊이 숨어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산감에게 단속되면 그날 하루 열심히 채취했던 땔감을 뺏기게 되고 행정처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단속을 피하기 위해 깊은 산속에서 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깜깜한 밤이 되어야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하루는 모친을 도와 산에서 땔감을 채취하다 추워서 불을 피웠다가 모친으로부터 되게 혼난 적이 있었다. 산에서 연기가 나면 산감에게 들켜 곤혹스러운 일을 당할 수도 있어서 이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가정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산에서 땔감 채취를 금지하려면, 국가에서 먼저 농가에서 사용 가능한 연탄이나 석유 등 대체 연료를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내가 궁핍했던 농촌에서의 어린 시절 생활 경험을 구구절절하게 소개하는 것은 그런 경험들이 나의 뇌리에 은연중에 뿌리내려서 나의 행정 철학과 관념 형성 등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행정권한 행사는 절제되어야 하고 공정해야 하며,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배려심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행정기관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으며, 막연하게나마 행정권력에 대한 동경심도 갖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웅크린 채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 그 웅크림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날갯짓이 움트는 자리에, 조용히, 그리고 깊게 머무는 교룡이 되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 그 신뢰와 온기를 품은 사회적 자본.

그 터전이 되기 위해, 나는 지금도 이 자리에서 꿈을 지켜본다.


교룡산사유 김정선.jpg.png

.*이 글은 글쓴이의 저서 『높이 오르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이유』 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가을의 교룡산.jpg 교룡산 전경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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