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공원, 역사의 숲을 걷다

공원뒤에 숨겨진 국가, 권력, 그리고 사람들

by 김정선

김정선 서울시 전문서기관

*『높이 오르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이유』(2025.1., 북랩)의 저자



서울대공원, 역사의 숲을 걷다

“공원 뒤에 숨겨진 국가, 권력, 그리고 사람들”


궁에서 공원으로: 창경원의 운명을 바꾸다

1970년대 중반, 창경원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졌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창경궁을 격하시켜 1909년에 만든 동물·식물 복합 전시장 창경원은, 민족문화 훼손의 상징이 되었다.

궁궐이자 문화재 공간에 맹수와 오락시설이 뒤섞인 구조는 역사성과 품격에 부합하지 않았다.


*창경궁(원)내에서 보트도 타고 케이블카도 탈 수 있었다니....
*큰 물새장도 있었다니.....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창경원의 동물과 식물을 외곽으로 이전하라”고 지시했고, 새로운 ‘서울대공원’ 건립이 비밀리에 추진된다.


코끼리, 사자, 호랑이를 보고 즐거워하는 아이들, 연인들이 고궁의 경관을 조망하면서 운치를 느낄 수 있는 케이블카도 있고 보트도 탈 수 있는 종합유원지로서 창경궁을 그대로 놔둬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


*한국동물원 80년사에 따르면, 박정희 장군이 5.16이후 정권을 차지한 후부터 이런 구상을 한 것 같다고

기술하고 있음.


이 계획은 단순한 동물원의 이전이 아니었다.

수도권 외곽 과천 일대에 국내 최대 규모의 공원을 건설하고, 이를 국민 휴식처이자 교육공간으로 삼는 국가 프로젝트였다.


1977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10개년 목표로 하는 대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남서울대공원계획”에 서명하였다.

1000017259.jpg * 그해 1월 5일, 대통령이 서울시에 대한 연두순시차 서울시청을 방문했을 때, 현장에서 서명하였다 한다.


물론, 여기에는 보다 동물원 이전이라는 것과 함께 국가의 명운을 건 비전이 함께하였다.

즉, 민족의 얼을 되살리는 창경궁 복원 외에, 북한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한강 이남으로의 정부종합청사 이전이라는 국가지대사가 내재해 있었다.

1000017266 (1).jpg *남서울대공원계획에 수록된 시설배치도

하지만 토지 확보라는 첫 과제가 거대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목장 가장한 땅 매입, 정보조직이 나서다

정부가 직접 부지를 매입하면 땅값 상승은 불을 보듯 뻔했다. 박 대통령은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 ‘은밀한 사유지 매입’을 지시한다.


이를 실행한 인물은 바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춘.

그는 자신이 운영하던 목장의 확장인 것처럼 위장하여, 136만평의 광대한 막계리 일대를 비밀리에 매입했다.

“김 장군, 목장을 옮기게. 그 땅 지금 사들이고 있어.”

이 한마디는 당시 청와대에서 건네졌다는 박 대통령의 지시였다.


김재춘은 당시 땅 소유주들과 교묘히 협상하면서 시장가보다 약간 높은 수준으로 토지를 매입해 나갔다. 이 부지는 훗날 서울대공원의 56%를 차지하게 되며, 김재춘은 대통령의 구두 약속을 믿고 "운영권을 주겠다"는 말에 국가에 무상 기부를 결정한다. *이 스토리는 김재춘의 주장이다.


대통령의 서거, 그리고 뒤집힌 약속

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격으로 급서하면서 모든 약속은 공중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서울시의 얘기는 김재춘의 주장과는 다르다.

김재춘은 일부 토지인 95천 평에 대해 공공건설후 민자사업 부분에 대해서 30%에 대한 운영권을 받기로 하고, ‘78.10.7. 서울시에 기부채납했으나, 이미 그 토지가 은행에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어 ’기부채납‘이 어려운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공공성 vs 사적 신뢰’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한국 현대사 속 한 장면이다.


지도에서 지워진 마을, 막계리

서울대공원이 조성되기 전, 과천시 막계리는 평범한 농촌이었다. 380여 가구, 1,900여 명이 논밭과 밭둑을 일구며 살아가던 삶의 공간이었다.

*막계(莫溪)리는 당시, 1,2리가 있었는데, 2리가 300세대에 1,5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막계1리는

현재의 ‘서울동식물원’, 막계2리는 ‘서울랜드’자리였다.


화면 캡처 2025-07-25 091042.png *1977년, 서울대공원이 들어서기 전의 막계리 모습

대공원 조성계획은 주민들의 동의를 충분히 구하지 못한 채 속전속결로 진행되었고, 주민들은 보상금과 함께 과천시 문원동 등지로 ‘집단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고향을 잃었고, 농사를 짓던 삶은 단절됐다. 한 주민은 회고한다.

“서울대공원은 우리 논밭이었어요. 지금은 호랑이가 사는 곳이지만,

예전엔 우리가 호랑이처럼 억척스럽게 살아가던 마을이었지요.”


서울대공원의 성공은 누군가의 상실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공공의 이익’을 다시 성찰하게 한다.


김재춘과 서울시, 법정에서 만나다

서울시와 김재춘의 소송전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가능했다. 전두환 군사정권하에서 김재춘은 소송을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구두 합의, 기부 전 서류, 구체적 사용계획 등이 담긴 문서를 일부 공개하며 "운영권 또는 운영이익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주장했다.


서울시는 다시금 "법적으로 운영권 계약은 존재하지 않았다"며 맞섰고, 결국 김재춘은 1심에서 패소한다.

1심에서 패소 후 고등법원에 항고소송까지 제기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사건은 서울시의 승소로 종료되었음이 명확한 것 같다.


이 과정은 국가가 비공식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할 때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기억의 공원, 그 안의 사람들

서울대공원은 오늘날 시민들에게 아름다운 동물원, 식물원, 테마가든으로 기억된다.

매년 수백만 명이 찾는 이곳은 단순한 ‘시설’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성장의 무대이기도 하다.

화면 캡처 2025-07-25 120609.png *대공원 개장당시 현 미리내다리의 인산인해 인파 모습


아버지를 따라 창경원에 갔던 아이가 성장해 자신의 손주와 함께 대공원을 찾기도 하고,

아빠 손에 이끌려 대공원에 왔던 아이가 이젠 성인이 되어 자신의 아이와 함께 방문하기도 한다.


2∼3세대가 같은 장소에서 새로운 가족사를 이어가는 그 기억이야말로 서울대공원이 지닌 진짜 가치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공원의 이면에는 국가 권력의 결정, 보이지 않는 희생, 그리고 잊힌 이름들이 있다.

대공원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위해 희생된 자리에 대한 기억 역시 함께 보듬어야만 진정한 ‘기억의 공원’이 될 수 있다


1000017327.jpg *1984.5.1. 서울대공원 개원식에 참여한 당시 대통령과 영부인


* 이 글은 서울특별시에서 편찬한 “한국동물원 80년사”(1996.2., 발행인 조순)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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