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하나에도 욕망과 운명이 담긴다.

차량번호에 얽힌 에피소드

by 김정선

김정선 서울시 전문서기관

*『높이 오르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이유』(2025.1., 북랩 出)의 저자

“강원랜드 대표 차량인가요…?”

어느 날 저녁, 내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에서 마주친 한 차량. 번호판은 “9999”였다.

괜히 멈칫하게 되는 숫자였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건 ‘강원랜드’, ‘VIP룸’, ‘끝판왕’...

물론 내 상상일 뿐이지만,

저 네 개의 아홉 숫자는 무언가의 최정점, 운의 결정체,

혹은 절대 권력처럼 보였다.

혹자는 화투판의 “구땡”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2010년, 내가 마포구청 기획재정국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전기공사업협회 회장님의 차량번호가 “7272”였던 것이다.

나는 회장님께 조심스레 여쭈었다.

“이 번호, 혹시 특별한 의미가 있으신가요?”

회장님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찌릿찌릿하잖아요. 전기쟁이에겐 딱 어울리는 숫자죠!”

그 대답에 웃음이 나면서도, 머릿속엔 두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하나는 성공한 사람은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


또 하나는 이런 번호는 어떻게 뽑았을까?

당시엔 ‘좋은 번호는 줄을 서면 얻을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떤 야루(편법)가 동원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숫자에 담긴 한국인의 마음

그 뒤로 도로 위에서 차량번호를 보는 내 눈이 달라졌다.

단순한 네 자리 숫자에 사람들의 삶과 바람이 담겨 있다는 걸 알게 됐다.


1111 – 자녀가 1등 하길 바라는 학부모의 기도

9988 – 99세까지 팔팔하게 살고 싶은 건강 기원

8282 – 성격 급한 이의 빠릿빠릿한 번호

1004 – 천사 같은 이미지를 담은 순수함

4444 – 죽을 사(死), 여전히 꺼림칙한 숫자

9999 – 혹시 ‘구땡’? 화투에서 최고의 패, 반전과 요행의 상징

번호판은 어느새 그 사람의 정체성과 정서의 반영물이 되었다.

운전면허증보다 먼저 드러나는 성격 진단서라고도 할 수 있다.


‘번호’에 진심인 나라들 – 중국은 이미 시장이다

중국에서는 이 숫자에 대한 집착이 국가 산업 수준이라 할 것 같다.


“8”은 발(發)과 발음이 같아 부자의 상징,

*8(八, bā)로 發(돈벌다, fā)와 유사

“6”은 순(順)의 의미로 순조로운 삶을 의미,

*6 (六, liù) 流(liú) – 흐르다

“9”는 오래(지우 久) 지속되라는 뜻에서 선호된다.

베이징: “8888” 번호판, 경매에서 약 2억 원 낙찰

광저우: “9999” 번호판, 약 7억 원 거래

번호판 경매는 정부 공식 세수 확보 수단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일본은 ‘니코니코(2525)’, ‘이이후우후(1122)’ 같은 언어유희 번호판이 인기라고 한다.


한국은 아직 ‘희망번호 추첨제’ 단계 ?

한국에서도 차량번호에 대한 관심은 높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희망번호 추첨제나 경매제가 시행되지 않고 있다.


글쓴이가 서울의 특정 구청 차량등록업무 담당자에게 확인결과, 등록신청자에게 10개의 차량번호를 보여주고 그 중 1개를 선택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인터넷 검색하다보면, 차량등록대행하는 업체들에서 “희망번호 추첨제”를 시행 중이라면서 “자동차365”나 “차량등록사업소”에서 신청하면 된다고 현혹하는 문구들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렇다면, 내가 봤던 차량번호 9999 차주는 엄청난 대운을 가진 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최근 한국에서도 입법예고, 국민제안 등에서 경매제 도입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편법’ 의혹이 나올까?

일반 시민 사이에선

“어떻게 저런 번호를 받았을까?” 하는 의심과 불신도 존재한다.

딜러·대행업체의 사전 개입 가능성??

“결국, 돈 많고 빽 있는 사람이 번호도 좋더라”는 냉소

이는 제도 자체보다는 운영의 투명성과 신뢰 문제로 보인다.

차량번호는 그저 숫자일까?

어느 날 주차장에서 본 9999 차량을 보며

나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번호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사람들의 욕망, 상징, 기원, 그리고 정체성이 응축된 코드다.

‘찐 성공러는 명함보다 먼저 번호판에 자기 이야기를 새긴다’는 말처럼

번호판은 도로 위의 작은 자서전,

혹은 운명을 바꾸려는 부적일지도 모른다.


차량번호를 둘러싼 사회적 상징과 계층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경매제 도입은 공정한 제도 발전인가, 계급화의 또 다른 얼굴인가?

제도를 공정하게 만드는 것과 공정하게 인식되게 만드는 것, 무엇이 더 어려운가?


번호판은 신분이 아니라 신념이다.

숫자 하나에도 나만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작은 성공이다.”



P.S. 9999 차량번호판을 보면서, 강원랜드를 연상하게 된 것은 아마도 요즘 강릉의 극심한 가뭄과 과거 세상을 떠들섞하게 했던 강원랜드 채용비리사건이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연결된 것 같다.


지역토착세력들과 검-관-정-법이 한몸이 되어 서로의 불순한 이익들을 보장하기위해, 지극히 공정해야 할 청년들의 취업경쟁을 오염시켰다는 의혹이 세상에 알려졌던 사건.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처럼 묻혀버린 사건.


지금이라도 다시 조명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강릉지역에 많은 비가 내려. 지난날의 어두웠던 그림자를 말끔히 씻겨버리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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