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장기비전을 제도화하자

행정실패의 근원적 해결책+안정된 미래를 위해

by 김정선
국가장기비전.png

* 김정선 서울시 전문서기관

"높이 오르지 않아도 꿈꿀 수 있는 이유" (2025.1. , 북랩 출판사)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위하여


나는 행정을 하며 수많은 정책이 태어나고, 수정되고, 그리고 사라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정부는 이전 정부의 계획을 폐기했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름의 비전을 세웠다.

그러나 그 비전의 상당수는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아니라, 정권의 색깔에 맞춰 간판만 바뀐 경우가 더 많았다.


이렇게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국가의 방향까지 함께 뒤흔들리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정권 교체라는 자연스러운 민주주의의 과정이 국가 운영의 근본적 일관성까지 흔들어 버리는 현실을 계속 목격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에너지 정책에서 반복되어 왔다.


1. 왜 한국은 장기비전을 정착시키지 못하는가

한 정권에서는 “원전 확대”가 기후위기의 해법이라고 주장했고, 다음 정권에서는 “탈원전”이 유일한 답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다음 정권에서는 다시 원전을 중심축에 놓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정책의 급격한 방향 전환 속에서 국민은 결국 이렇게 묻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맞는 건가? 왜 정책이 몇 년마다 달라지는가?”


이 극단적인 방향 전환은 비단 에너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부동산 정책은 수년 간격으로 규제와 공급 완화 사이를 오락가락했고, 기후정책은 강화와 조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일관성을 잃었다.


공공기관 조직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편되었고,
현장에서 정책을 집행해야 하는 공무원들은 그때마다 앞서 만들어 놓은 계획을 다시 뜯어고쳐야 했다.


이런 반복된 혼란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결국 국민이었다.

기업은 미래 투자를 결정하기 어려워지고, 정부 조직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재정과 시간을 낭비하고,
국민은 국가가 제시하는 방향 자체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2. 행정실패의 가장 근본 뿌리 : “정권 중심의 단기비전”

한국의 장기비전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세우는 비전이 ‘국가 전체의 비전’이 아니라 ‘정권의 비전’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면 비전도 함께 교체된다.
그래서 비전의 내용보다 “누가 만들었는가”가 더 중요해지는 기형적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악순환이 바뀌지 않는 한, 행정실패는 구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3. 대안 : 초정권적 장기비전 체제를 세우자

(1) 독립된 국가장기전략위원회의 설치

장기비전은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라 국가의 자산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비전의 설계와 조정, 평가를 담당하는 기구를 행정부 바깥에 두는 방식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역할을 수행할 독립적 국가장기전략위원회를 상상한다.
위원회는 대통령 산하가 아니라 국회나 독립기관 소속으로 두어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해야 하며,
위원들의 임기도 정권의 임기와는 철저히 분리해 최소 7년 이상의 장기성을 보장해야 한다.

이 기구는 에너지, 기후, 국토, 물, 교통, 인구와 같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분야에 대한 장기 전략을 마련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큰 방향이 유지되도록 정책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2) 국가 장기비전을 국회의 동의 대상으로 격상

지금의 장기계획은 행정부 내부 문서에 불과해, 정권이 바뀌면 매우 쉽게 폐기될 수 있다.

따라서 2050 탄소중립이나 국가 에너지믹스, 국가 물·국토·교통계획 등과 같은 핵심 비전은 국회의 동의를 통해 정권이 아닌 ‘국가의 문서’로 승격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어느 정권이든 마음대로 비전을 폐기할 수 없게 되고, 정책의 일관성이 자연스럽게 확보된다.


(3) 정책 변경 시 ‘매몰비용 평가’를 의무화

우리는 때때로 정권 교체와 함께 거대한 정책들이 “감정적으로” 폐기되는 장면을 보아왔다.

그러나 정책 전환은 단순한 의지나 구호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뒤에는 실제로 엄청난 재정 비용과 사회적 비용, 그리고 국민의 혼란이 따른다.


따라서 정부가 장기 정책을 전환하거나 폐기하려면
기존 정책에 투입된 자원과 발생하는 매몰비용, 새로운 정책의 효과, 그리고 이해관계자에게 미칠 영향을 반드시 사전에 평가하여 공개해야 한다.

정책은 이제 “신념”이나 “기분”이 아니라, 근거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수정되는 체계가 되어야 한다.


(4) 핵심 국가비전을 법률로 고정

영국과 독일은 탄소중립이나 에너지전환과 같은 국가적 비전을 이미 법률로 규정해 정권이 마음대로 목표를 바꾸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도 더 이상 에너지·기후·국토·환경 정책을 정권의 성향에 따라 뒤집어버리는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전이 법률로 고정되면 정권은 속도와 방식만 조정할 수 있을 뿐, 국가의 방향 자체를 흔드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4. 기대효과 : 흔들리지 않는 나라로 가는 길


이 제도가 자리 잡으면 정책의 일관성이 크게 회복되고, 국가의 미래가 정권에 좌우되던 불안정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기업은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고, 지자체와 공공기관은 중장기 계획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공무원 조직도 “어차피 다음 정권에서는 다 바뀐다”는 냉소에서 벗어나 장기적 관점에서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국민은 국가가 제시하는 미래를 믿을 수 있게 된다. 정책이 매번 흔들리지 않고,
비전이 정권의 흥망을 따라 요동치지 않을 때
비로소 국가는 안정된 발전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5. 행정실패학과의 연결 : 왜 이것이 핵심 처방인가

장기비전의 제도화는
이 책에서 제시한 다섯 가지 행정실패 유형 모두를 동시에 치유하는 유일한 근본 처방이다.

∎정권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던 불투명한 의사결정을 바로잡고

∎비전이 흔들리면서 생기던 실행의 무력화를 멈추며

∎조직 내부의 불안과 냉소로부터 비롯되는 심리적 저항을 완화하고

∎정권 변화와 함께 무력화되던 선의의 정책들을 보호 하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형성되던 관계 카르텔의 고리를 끊는다


말하자면, 장기비전의 제도화는 행정실패라는 깊고 오래된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해법이다.


맺으며

우리는 오랫동안 정권이 바뀌면 국가의 비전이 함께 바뀌는 나라에 살았다.
그러나 국가는 정권보다 길고, 국민의 미래는 정권보다 더 멀리 가야 한다.

이제는 묻고 싶다.

정권이 아니라 국가의 비전을 만들 용기,
그 비전을 지켜낼 제도를 만들 용기,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만들 용기가
지금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장기비전의 제도화는 그 첫걸음이다.
정권을 넘어서 국가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가장 절박하고도 근본적인 질문이자 제안이다.


* 이 내용은 학계와 정책연구기관에서 논의되는 국가 장기비전체제 관련 연구 흐름에 글쓴이의 사유 등을 정리한 것으로, 올해 3월중 출간예정인 "행정실패학 : 왜 시민은 불안해지고 배제되는가"에 포함된 사항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씽크홀 없는 도시, 경계없는 행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