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의미들에 대해.
1.
나 말이야, 원래는
나뭇가지는 메마르고 기다란 갈색선.
잎들은 제각기 솟아있는 초록색 타원형.
구름은 희끄무레하게 방황하는 뭉텅이.
하늘은 쓸모없이 비어있는 허공.
그런데 그거 아니?
허공을 가르며 날아와 앉은
여름새의 움직임은
부리로 자신의 생명을 묻히고
포근한 깃털로 날갯짓을 하더니...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는데?
모든 게 바뀌었지.
온 힘을 다해 영양을 뻗어가는 나뭇가지는
굽이 굽이 자라 저만이 가진 각을 이루고
거칠음 속에 살아있는 힘을 품게 되었어.
초록잎들은 해의 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데
살랑이며 부대끼는 잎사귀들 사이로
속살거리는 빛살들이 푸르름을 노래해.
구름들은 저마다의 모양을 가지고서
하야디 하얀 꿈을 품고 하늘 위를 제 속도로
날아 여행하는 마음 뭉치가 되었고,
하늘은 자신을 스스로 비운 채
땅에 존재하는 모든 빛깔들을 한가득 안고 있는
누구보다 꽉 찬 품으로 변했지.
-모든 자연이 한순간에 아름답게 변할 수가 있니?
자연이 변한 게 아니야, 내가 변한 거야.
지난 여름새의 자그마한 몸짓이
눈에 담겼던 그 순간 말이야.
2.
어느 날 여름새가 빈 허공 사이를 가르며 날아와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 앉았었지.
발 안에서 세차게 흐르는 혈류가
죽어버린 기다란 갈색선을 깨운 거야.
제각기 솟아있는 짙은 초록색 타원 사이에
보드라운 털이 달린 머리를 들이밀더니
잎들을 간질이며 살랑임을 일으켰어.
자신의 살아있음을 묻히고 간
여름새는 생명을 나눠주고
희끄무레하게 방황하는 줄로만 알았던
구름들 사이로 제 하얀 꿈을 찾아 날아갔지.
여름새의 활기 있는 날갯짓을 따라
나는 고개를 들어 비어있는 허공을 바라보았고,
여름새가 나무 위로 날아왔다, 다시 하늘로 날아가는 순간들이
하늘 아래로 꽉 차있는 하나의 장면을 보게 되었어.
그렇게 나는 무더운 여름을
초록의 계절이라 부르기 시작했지.
모든 풍경이 나에겐 달라진 거야.
-여름새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만나느냐, 어떤 상황을 만나느냐,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취미를 만나느냐, 어떤 책을 만나느냐, 어떤 마음을 만나느냐에 따라 아무런 의미가 없던 것들이 삶 속에 새로운 의미를 낳기도 한다.
지금껏 내 삶에 무언가가 놓아두고 간 의미는 공감되지 않았던 노랫말이 가슴에 와닿는 의미가 되기도, 감흥 없던 물건이 자아내는 정취가 되기도, 흥미 없던 분야에 눈을 크게 뜨는 열정이 되기도 했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이다.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세상엔 찾아왔던 만남들이 두고 간 의미들로 가득 찰 것이다. 그렇게 남겨진 모든 의미들은 저마다의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내 세상을 가득 채우는 의미들이, 모두 ‘나’이기 때문에 그 의미들이 아름다워지도록 내가 지나온 모든 순간들을 스스로가 쓰다듬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날이 유독 무더울 때마다 언젠가 찾아왔다 날아간 여름새의 보드라운 털과 귀여운 고갯짓을 떠올린다. 그럼 모든 풍경이 초록으로 물들곤 했다.
오늘 내가 일하는 곳에도 언제 또 하나의 여름새가 왔다갈지 모른다.
삶의 자리에서 눈을 크게 뜬다면, 뜻하지 않게 우연히 찾아오는 작은 여름새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이 지금까지 마주쳤던, 혹은 오늘 마주치는 여름새가 무엇이든 당신의 여름이 마냥 무더운 계절이 아닌
빛나는 초록으로 물들기를 바라며.
저마다의 의미를 쓰다듬는 당신의 빈 마음으로
나의 빈 마음이 여름새가 되어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