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엔 믹스커피가 생각나요

근무 26주 차 공군 보급병의 일기

by 옆집 군대생

파란 하늘부터 까만 군화까지 내 시야에 담긴 모든 것들이 새하얀 색으로 가득 찬 날이다. 지금도 창문 밖에는 눈이 알알이 내리고 한가롭게 사무실 의자에 앉아 포근한 바깥 풍경을 쳐다보고 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면 몸은 얼었다가 다시 녹기를 반복하고 의자에 기댄 머리는 노곤함을 느낀다. 커피는 깔끔하고 씁쓰름한 것이 매력이라 생각하기에 평소에는 주로 아메리카노를 찾지만 이런 날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믹스커피가 생각난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 커피를 늦게 접한 편이다. 카페인 함유량 때문에 몸에 좋지 않다는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착한 아이였나 보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는 친구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설탕 맛이 진한 코코아를 홀짝였던 기억이 난다. 마셔도 어차피 네 입에 맞지 않을 것이라는 어른들의 얘기를 믿었기에 그냥 손을 대지 않았던 것도 같다.


근데 사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어렸을 때는 다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하면 안 되고 어른들만 할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이 모이고 모여서 어른과 아이 사이의 벽을 쌓았고 그 벽을 깨는 친구들이 괜히 멋있어 보이곤 했다. 다들 그렇겠지만 다 크고 나서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참 귀여웠다. 영원히 커피를 못 마시는 아이일 줄 알았는데 이제는 오히려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들이키고 있으니… (오히려 살찐다고 코코아를 기피한다.)



사실 이렇게 어른과 아이를 가르는 요소는 술, 담배 등 다양하다. 범생이 같이 들릴 수도 있지만 술이나 담배는 애초에 호기심이 가지 않았다. 그에 비해 커피에 대한 호기심은 꾸준했다. 그때의 한(?) 때문일까. 나에게 커피는 어른과 아이를 가르는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남았다. 정확하게는, ‘믹스커피’가 나에게는 그런 존재이다.


어린 시절, 믹스커피를 가장 많이 본 곳은 학원이었다. 수학 학원이든 영어 학원이든 상관없이 학원만 가면 믹스커피가 보였다. 왼손에는 종이컵, 오른손에는 믹스커피를 들고 스틱의 끝을 잡아 탁탁 턴 후 이를 개봉해 설탕, 프림, 커피 등을 종이컵으로 쏟아냈던 선생님. 커피를 젓기 위한 스푼이 있었음에도 그대들은 굳이 믹스커피 스틱으로 커피를 저으셨다.


커피가 무슨 맛인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의 나는 그냥 그 모습이 어른의 모습 같아 보였다. 분필을 잡고 열심히 강의를 하시다가 한 모금, 문제를 풀게 시켜 두시고 핸드폰을 보시다가 두 모금. 그렇게 조그만 종이컵 안의 커피는 나의 호기심이 그곳까지 닿기 전에 사라져 버렸다. 눈이 내린 날 힘겹게 학원에 도착해 난로에 몸을 녹일 때면 나에게는 온기를 주지 않고 사라져 버린 믹스커피가 괜스레 야속하기도 했다.



작년 겨울에 유독 믹스커피를 많이 마셨던 기억이 난다. 혹시 그 이유를 맞춰볼 수 있겠는가? 힌트는 위의 문단에 있다. 냉장고에 셀렉션과 같은 비싼 아이스크림을 가득 담아두고 이것이 어른의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런 심리였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학교 근처 수학학원에서 중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기숙사 서랍 속에는 블랙커피와 녹차만이 가득했으나 학원에 있을 때만큼은 항상 오른손에 믹스커피를 쥐었다. 분명 학원 사무실에도 블랙커피가 있었지만 내 손은 믹스커피로만 향했다.


내가 기억하는 학원 선생님의 모습에는 항상 믹스커피가 있었고 그것이 어린 시절 나에게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아직 21살밖에 되지 않았던 나에게는 아직도 어른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눈 내리는 하늘을 볼 때면 마음이 깨끗해지며 어린 시절이 어렴풋이 겹쳐 보였는데 그 마음으로 발을 들인 학원에서는 내가 아이들 앞에 서 있는 학원 선생님이라는 것이 웃겼다.



사실 군인이 쓰는 눈에 관한 글에는 마땅히 제설이 있어야 하겠다만 아쉽게도 나는 아직 제설을 해본 적이 없다. 덕분에 눈을 봐도 쓰레기가 내린다는 생각보다 어린 시절을 먼저 떠올릴 수 있었다. 글을 적는 사이 눈발은 더 거세졌고 종이컵은 두 번째 잔까지 비워졌다. 주황색 빛을 내던 창문 밖 대대 건물의 지붕은 어느새 절반 이상이 하얗게 뒤덮였다.


어쩌면 내일은 첫 제설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포근함을 좀 더 즐기려 한다. 오늘처럼 눈이 새하얗게 나앉은 날에는 믹스커피가 생각난다. 눈을 보며 철없이 행복했던 그때의 내가, 어른 같아 보이고 싶었던 작년의 내가 그려진다. 그리고 나중에는 지금처럼 믹스커피를 마시며 오늘의 나를 그릴 것이다.




* 커버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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