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근무 2주 차 공군 보급병의 일기

by 옆집 군대생


몸이 힘든데 마음이 안 힘들 수는 없다.


입대하던 날, 나보다 1년 먼저 군대에 발을 들인 친구가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오랜만에 이 말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



나는 공군 모 비행단에서 일하고 있는 보급병이다. 자세한 설명은 보안이 두려우니 생략하겠다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비행단의 창고를 관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창고에 물건이 들어오거나 빠지면 업무가 생긴다. 군에서는 이렇게 들어오고 나가는 군용 물건들을 ‘군수품’이라고 부른다. 이번 주에는 선임분들도 걱정하셨을 정도로 많은 양의 군수품이 들어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텍스트로만 적혀있는 군수품의 수량이 어느 정도의 업무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지를 근무 2주 차밖에 안 된 일등병인 나는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음료수 (36,000EA)


이렇게만 쓰여있으면 저게 어느 정도의 양인지 감이 올 리가 없지 않은가. 음료를 하루에 한 병씩 마셔도 100년이 걸리는 양이겠구나.. 정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음료수 36000개면 대충 많은 거 같긴 한데 얼마나 많은 거지..’ 싶을 테니 한 번 간단한 계산을 통해 저 수치와 가까워져 보도록 하자.


일단 이번에 들어온 음료수는 한 박스에 24개씩 들어있었으니 총 1500개의 박스가 들어온다고 보면 된다. 음료수를 담고 있는 박스를 트럭에서 내리고 나면 우리는 이를 다시 쌓아야 한다. 창고에 보관해야 하니 당연한 과정이다. 박스를 쌓는 방법을 그림으로 한 번 나타내 봤다. (어지간히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나 봄..) 하단과 같이 박스로 한 층을 만들고 그 위층은 하단의 그림을 좌우 반전한 것과 같이 박스를 쌓는다. 이 과정을 계속해서 반복하면 박스 탑이 만들어진다.


박스 탑을 위에서 바라본 모습


그렇게 120층짜리 박스탑을 쌓는 것이 이 날의 퀘스트였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말이다. 물론 10층 정도씩 나눠서 12개를 쌓기는 했다만 난 태어나서 이런 일을 해본 적도 없고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여태껏 살아오며 해본 정리라고는 옷장 정리 같은 것뿐이던 내게 비행단의 옷장을 정리하라는 퀘스트가 내려진 것이다. 누군가는 군대까지 갔으면서 그 정도 일 가지고 찡찡대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쉼 없이 달려오는 1500개의 박스들은 꽤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안겨주었다.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높이를 맞추기 위해 숙였던 허리는 아파오고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은 하얘졌다.



이렇게 오전을 보내며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쳤다. 이 글을 시작하며 내가 언급했던 문장이 기억나는가? “몸이 힘든데 마음이 안 힘들 수는 없다.” 이젠 마음이 힘들 차례이다. 오후에는 각 대대에서 우리 창고를 찾아와 자신들 앞으로 나온 군수품을 꺼내갔다. 하필 오늘따라 많은 대대들이 창고를 찾아오더라.. 나는 군수품을 꺼내 주러 창고와 사무실을 오가는 일이 극도로 하기 싫었다. 그만 좀 자신을 괴롭히라고 다리가 소리치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모두가 그랬겠지만 나도 그랬다.


막내이기에 선임들보다 먼저 뛰어다니고 열쇠를 챙기고 더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눈치껏 그렇게 해야 함을 머릿속에서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다리는 이따금씩 반항심을 드러내더라. 계속 뛰어다니다가도 조금씩 주춤하고 선임 분이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 것을 방관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 이 친구의 반항심이 3시쯤에 극에 달했다. 바빠도 너무 바빠서 사무실의 모든 간부, 병사들이 창고에서 대기하게 된 때였다. 그때 나는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창고를 떠나 사무실로 향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물론 사무실에 가서 쉰 것은 아니다. 서류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받는 등 업무를 지속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를 끝내고 퇴근하는 길 선임분이 나지막이 한마디 해주셨다.


“xx아. 사람들 전부 창고에 있으면 사무실 가 있지 마. 몸 쓰는 일 같은 거 있으면.. 먼저 나서서 하고.”


“예, 알겠습니다.”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오늘 하루 흘린 땀과 부여잡은 허리를 생각하면 순간 억울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밉보이지 않길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침대에 몸을 뉘임과 동시에 많은 생각들이 밀려왔다. 일단 첫째는 항상과 같이 나를 향한 자책. 왜 그때의 나는 사무실로 향했을까. 왜 사무실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며 나의 잘못된 선택을 합리화했을까. 둘째는 그렇게 시작된 자책의 확장. 근무 중간중간에 과자는 왜 그렇게 많이 먹었을까.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운동하면 뭐하나. 심지어 오늘은 졸리다고 아침 구보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려는 건가. 그리고 마지막은 합리화. 그래. 오늘 쉬었으니 내일 더 뛰자. 과자 먹는 거 조금만 자제하고 운동하자. 잘못을 했고 그것을 알았으니 다음부터는 안 하면 된다. 넌 할 수 있잖아.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합리화는 나쁜 것이 아니라 성숙한 방어기제의 한 종류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그 덕분인지 다음 날의 나는 별로 복잡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었다. 전날보다 일정이 수월하기도 했지만 조금 더 뛰고 조금 더 나섰다.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 자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성공했다.


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 그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알 수 있다고 해도 변하는 게 없다면... 그렇다면 그냥 몰라도 될 것 같다. 오늘의 나는 이렇게 지독하게도 힘들었던 하루의 기억을 넘겨버릴 생각이다. 어제의 나는 고달팠지만 오늘의 나는 그 힘들었던 어제의 기억 덕에 더 힘을 내고 조금 더 변화할 수 있었으니까. 설령 그러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그럴 땐 그냥 군대 탓을 해버리자. 너무 깊은 생각과 자책은 나 자신을 갉아먹을 뿐이라는 걸 이젠 알고 있으니까.



* 커버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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