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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Nov 11. 2022

목캔디에 대한 단상

- 지하철에는 사람이 있다

 


    엊그제 서울을 다녀왔습니다. 양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춘천역에 내려 전철을 탔습니다. 상봉역에 내려 지하철 7호선을 타고 강남구청역에서 내릴 즈음이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께서 승객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면서 초콜릿과 목캔디를 파는 것이었습니다. ‘사달라’는 구호 대신에 목캔디를 승객에게 슬며시 내밀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이미 익숙하게 봐왔던 터라 시선을 외면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처리했습니다. 익숙해지면 양심에 찔릴 구석도 없어지기 마련이죠. 하긴 지하철에선 잡상인이 물건을 파는 행위 자체가 금지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건을 사주는 게 불법을 부추기는 격이 되기도 하죠. 


  어쨌든 그 할머니에게 나는 천 원짜리를 건네주었습니다. 목캔디를 주시더군요. 나는 목캔디를 사양하며 ‘됐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내게 기어이 목캔디를 주었습니다. 제 건너편 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도 천 원짜리를 주고, 목캔디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별 수 없이 나랑 똑같이 받고 말았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목캔디를 바로 백에 넣더군요. 나도 그제서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목캔디를 팔던 할머니의 눈빛이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눈빛이 뭐랄까요, 약간 푸른 불꽃처럼 타올랐어요. 냉정하게 이글거린다고나 할까. 

  동정하려고 하지 마라. 구걸하는 게 아니다. 정당한 가격으로 파는 거다. 

  일종의 그런 시그널이었던 눈빛이었죠. 남루한 모습이었긴 해도 초췌하거나 비굴하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구걸은 영혼을 초라하게 구겨버리기 마련인데 그런 것 하고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서늘한 눈빛과 동정을 거부하는 야멸친 손짓. 오히려 은연중에 동정을 베푸는 내 손길이 어색했고, 난감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베푸는 자의 이타적 행위야말로 가장 이기적인 행동이죠. 남을 위한 게 궁극적으로 자신의 심적 위안이나 위로가 되기 때문이니까요.


  그 할머니의 눈빛에서 가족의 서사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치매를 앓아 요양원에 입원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자폐증에 당뇨와 혈압이 높아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못해 반지하 방에서 할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죠. 할머니가 지하철의 잡상인 게릴라가 된 건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기초생활수급자로서 정부의 혜택을 받지만 그것만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게 어림없으니까 결국은 생활전선으로 뛰어들 수밖에요.      


  내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 되는 척력의 시대에 자신이 아닌 타인의 정서에 공감하고, 사이를 극복해 유화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행동이 오늘을 살아가는 실용적인 인간의 조건으로서 버려야 할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붙들고 있는 제 자신이 헐렁해 보였고, 대책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요 모양으로 요 꼴로 살 수밖에. 인의예지 사단의 끄트머리를 외면하고, 멋진 괴물이 돼야 성공을 움켜쥐는 법인데 그 노하우를 모르니 평생 남루하게 사는 건 떼놓은 당상이네요. 내 어깻죽지에서 군내가 나고, 걸음걸이도 비틀거리는 게 북경원인의 직립에 가깝다는 걸 알았습니다. 지하철 안에는 스마트폰으로 무장하고, 유명 패션 브랜드를 과시하는 초인류 무리들이 사냥을 나가는 중이었고, 나는 사냥에 실패한 전사였습니다. 시골에서 지내다 보니 도시적 풍경은 훨씬 살벌하고, 사막 같단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지하철의 소음이 모래사막의 황사처럼 거칠게 서걱거렸습니다.     

  할머니가 건네준 목캔디, 뜯지 못하고 그냥 둘 것 같습니다.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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