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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Jan 05. 2023

신춘문예, 잔치는 끝났다!

- 단편소설 당선작 네 편에 대한 단상

  단편소설 당선작 <쥐>, <녹>, <난간에 부딪친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 <휠얼라이먼트>에 대한 단상      


    새해에는 숙제를 하듯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는 게 버릇이 됐습니다. 즐거운 숙제죠. 모든 장르의 당선작을 다 읽는 건 아닙니다. 시, 동화, 때로는 문학평론도 읽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눈길이 가는 건 단편소설 당선작입니다. 이번에는 어떤 당선작을 냈을까? 당선작을 읽다 보면 신문사별로 비교가 되기도 합니다. 상대적인 우열을 따지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심사위원들이 선택한 당선작의 기준에 동의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최종심에 올랐던 다른 작품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당선작이 되는 건 거의 심사위원의 취향에 달려있으니까요. 


  올해 단편소설 당선작 가운데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의 당선작을 읽고 느낀 점을 간략히 정리해 봅니다.        



  조선일보 <쥐> 전지영.    

            

  해군 관사 단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색다르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배경이죠. 군인가족 간의 관계는 남편의 계급으로 아내의 호칭이 결정됩니다. 군대의 상명하복 체계가 가족관계까지 결정짓는 폐쇄적 집단이죠. 그 집단에서는 관사의 관습을 따르는 게 정의이기도 합니다. 여자들의 남편인 군인들의 덕목과 생존전략은 정의감과 애국심이 아니라 명령을 따르고 임무를 완수하는 것뿐이죠. 군함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대해서 상부에 보고하는 게 윤진의 남편과 선의 남편이 다르고, 그로 인해 한 사람은 승진의 기회를 잡고 다른 사람은 전역할 수밖에 없는 비운을 맞게 되는 장면은 이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군대라는 특수한 배경과 집단 구성원이 보여주는 민낯은 이미 낯선 게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의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보수와 진보, 혈연과 지연, 신세대와 기성세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생존 정의와 덕목은 제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너무 많이 보아왔습니다. 어느 편에선 선이 되는 게 다른 쪽에선 악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적 모순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물론 그런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도 있긴 합니다. 

  <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사모의 쥐구멍에 대해 집착을 보이는 행동과 그 쥐의 상징성입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쥐로부터 헤어날 수 없습니다. 집안 구석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쥐, 그건 어쩌면 우리의 일상을 좀먹고 끝내는 마비시키고 마는 부조리와 모순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쥐는 박멸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 늘 상존하죠, 거의 광기에 가까운 사모의 쥐구멍에 대한 집착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쥐 모순과 부조리의 일상에 우리가 익숙하게 됐기 때문이겠죠. 당위에 속하지만 그런 당위가 내 현실의 안위나 감정을 불편하게 할 때는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쥐를 박멸하려고 하는 노력과 시도가 중요합니다. 그건 인간으로서의 의무이기도 하고, 거기에서 우리 사회가 조금씩이나마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쥐>의 결말 부분은 참담한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쥐구멍에 불을 붙였는데도 그 불구멍에서 쥐 한 마리 튀어나오지 않죠. 윤진은 그걸 보고 나서야 쥐는 밤이 돼서야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쥐에 둘러싸여 싸여있지만 무난하게 살고 있는 타성적인 삶, 익숙한 모순과 불편하지 않은 부조리는 어느 새 우리의 일상이 됐죠. 별일 없이 그런 현실을 오늘도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게 끔찍할 뿐이죠.               

  


  동아일보 <녹> 공현진.


  <녹>은 잘 짜진 드라마 같았습니다. 뚜렷한 캐릭터, 적절한 대사, 리얼한  배경, 아이러니한 상황 설정이 딱 맞아떨어지고, 거기다 소도구를 적절하게 활용해서 미장센 효과까지 냅니다. 스토리는 익숙합니다. 다문화 가정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나는 대학 강사이고, 녹은 다문화 수강생입니다. 녹이란 이름은 제목이기도 한데 중의적 의미를 띱니다. 쇠붙이 겉에 붙어있는 물질로 떼어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녹이 그런 인물입니다. 형편이 녹녹지 않은 나는 수강생인 녹을 반값으로 베이비시터로 고용하죠. 거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녹은 자신의 아이인 바잇까지 집으로 데려와 나의 신경을 거스르게 만들죠. 사달이 나는 건 바잇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녹은 나에게 항의하기 위해 플래카드를 들고 학교에서 1인 시위를 하게 되죠. 이 소설의 묘미는 태오를 맡겼던 나와 바잇을 잃어버린 녹이 똑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게 우리의 삶이고, 인생입니다. 

  <녹>이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주는 미덕이 몇 가지 있습니다. 다문화가정 출신인 녹이 쓰는 어설픈 우리말을 통해서 여러 가지를 떠올립니다. ‘저가 열씸히 살았습니다.’ ‘모두는 제게 사과하는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현실에 고스란히 전가됩니다. 녹이 태오에게 의도를 가지고 쓴 게 아니라 그야말로 무심하게 쓴 말 “너 왜 안 똑똑해.”라는 말을 듣고 주인공인 나의 피가 솟구치는 건 당연합니다. 의사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은 소통의 왜곡으로 빚어진 거죠. 인생에서 실패라고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주임교수의 삶과 하루하루가 고단한 나의 생활이 빚어내는 콘트라스트도 빛이 납니다. 나는 시간강사에서 잘리지 않을까 고민하고, 번번이 2만 원 혹은 3만 원 어떤 때는 5만 원이 부족한 양육비를 보내주는 전남편과 목소리를 높여서 싸워야 하는데 주임교수는 흑단나무로 만든 핸드 드립 스탠드의 점성과 탄력을 늘어놓습니다. 거기다 문화재단에서 주는 상을 받게 된 주임교수는 나에게 축사를 써줄 것을 부탁합니다. 시간강사 자리보존과 미래에 대한 잠재적 보험의 기회비용이라고나 할까. 시상식에 알아두면 좋을 사람들이 많이 참석할 거라면서 “어때? 자기도 좋지?” 이어서 지나가는 말투로 “좀 잘 입고 와.”라는 대사에서는 다정한 악마적 면모를 드러냅니다. 매번 몇 만 원씩 모자란 양육비를 보내주는 찌질한 전남편의 캐릭터도 우리 주변에서 혹은 뉴스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한(?) 배드파더의 전형으로 시선을 끕니다. 이런 남자들 처리할 방법이 없을까요? 

  결말 부분은 정말 끔찍합니다. 녹과 바잇은 이제 보이지 않지만 뇌리에서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환영으로, 아니 현실로 재현됩니다. 그야말로 떨어지지 않는 녹이 돼버린 거죠. 그걸 안고 극복하며 살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한국일보 <난간에 부딪친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 전지영. 


  전지영 작가는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두 신문에 모두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한 군데 당선하기도 어려운데 두 군데 다 당선되었으니 놀랄 일이죠. 축하합니다. 

  아이가 사고로 죽게 되면 부부는 처음에는 자신 때문이라고 탓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를 비난하고, 결국에는 헤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난간에 부딪친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이 그런 부류의 소설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매력은 파국의 치닫는 게 아니라 고통과 굴욕을 견뎌내는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데 있습니다. 

  주인공 윤석과 혜경은 정주못에 빠져 죽은 아들 민준으로 인하여 서로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고, 그와 똑같은 몫으로 죄책감도 가지고 있죠. 서로에 대한 증오심은 일상의 대사로 생생하게 표현됩니다. 그 대사가 너무 날이 서있어서 상대의 마음을 후벼 팝니다. 한데 그것도 익숙해지면 상처로 남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의 무늬처럼 되고 말죠. 혜경의 윤석에 대한 증오심은 말로 그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그건 사격장에 가서 사격을 배우는 겁니다. 나중에는 모의총까지 구입하죠. 혜경의 위태로운 증오의 감정이 폭발하는 건 모의총을 윤석에게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입니다. 부부관계가 파탄되었다는 걸 뜻하지만 이들 관계는 지속됩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윤석은 민준이 죽었던 그 정주못에 가서 그동안 회피해왔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혜경에 대한 혐오와 경멸의 화살을 자신에게 쏘아버리는 거죠. 혜경은 비를 홀딱 맞고 들어온 윤석에게 왜 비를 맞았느냐고 묻지 않고, 졸아붙은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는 게 마지막 장면입니다. 뭐랄까 까칠한 증오심이 다 걸러지고 난 뒤, 식탁에서 보여주는 맹맹한 일상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게 가족이고, 사람 사는 거겠죠. 누구나 그렇게 견뎌내는 겁니다. 

  소설을 다 읽은 뒤, <난간에 부딪친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의 제목이 갖는 의미를 알게 됩니다.  

     


  경향신문 <휠얼라이먼트> 신보라. 


   참 특이한 소설입니다. 우선 내레이터인 나와 재이와 카센터 사장의 인물관계가 모호하고, 정체가 뭔지 알 수 없습니다. 무기체에 가까운 캐릭터들입니다. 존재 자체가 기능성을 띠고 있다 랄까. 그러니까 무슨 상황극인 것 같기도 하고, 부조리극 같은 느낌을 줍니다. 

  나와 카센터 사장은 연인관계입니다. 그런데 재이라는 인물이 그 사이에 끼어드는 게 아니라 나와 재이 사이에 카센터 사장이 끼어드는 설정 자체가 묘합니다. 나와 재이는 불륜도 아니고, 친구라고 하기도 그렇습니다. 그런 관계의 긴장을 유지하는 건 도발적인 대사와 행동입니다. 

  나와 재이가 차바퀴가 한쪽 없는 버려진 트럭에서 놀이를 하고, 카센터에서 훔쳐온 타이어를 끼워서 온전하게 만들지만 그게 어떤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유희적인 놀이일 뿐입니다. 카센터 사장은 오랫동안 희곡쓰기에 매달려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한 번에 구원해 줄 작품. 그에겐 온 생이 걸려 있지만 독자에겐 망상으로 보일 뿐이죠. 희곡 속의 주인공인 정아를 죽여야 할지를 고민하는 카센터 사장의 고민은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희곡이 희망이고, 구원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드는 묘한 느낌 하나는 어떤 행간과 장면에서는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겁니다. 사람의 성격과 이력을 외모가 아니라 냄새로 체크하는 게 놀랍습니다.     

  연속적인 홑문장으로 장면을 살아 있는 것처럼 생명력을 불어놓고, 도발적인 거친 문장은 타성에 젖은 인습에 자극을 줍니다. 거기다 의미가 모호한 장면들은 극적 호기심을 넘어 생의 어떤 이면을 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고단수 트릭이죠.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김승옥의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과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겹쳐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휠얼라이먼트>의 파국으로 치닫는 극적인 사건 없이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서사와 강인한 흡인력이야말로 이 작가의 능력이고,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음에 드는 두 문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능이라는 건 말이야. 가지고 있을수록 만신창이가 돼. 그냥 좀 평범하게 살아봐.”

  “내일은 저들에게 너무 벅찬 날이고, 영원히 오늘 속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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