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란하마 Jan 25. 2023

지금 여기, 당신이 소중한 이유

-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대한 단상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는 어려운 영화가 아니라 어지러운 영화입니다. 타이틀이 뜰 때, 소음에 가까운 사운드와 어지러운 자막부터가 그렇죠. 하지만 라이트모티프는 첫 장면에 암시되어 있고, 스토리도 간결합니다. 세탁기 뚜껑처럼 생긴 창안에서 남편(키 호이 콴 – 웨이먼드 역)과 아내(양자경 – 에블린 역), 딸(스테파니 수 – 조이 역)이 행복하게 노래를 부르는 게 첫 장면입니다. 그런 가족의 행복한 장면이 일시에 사라지면서 현재 놓여있는 어려운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행복했던 과거는 다 지나가고, 지금 남아 있는 건 지옥 같은 현실뿐이죠.   

  국세청에 차압당하기 직전에 놓인 세탁소, 아내와 이혼서류를 준비하는 남편, 영 못마땅한 동성 애인을 데려오는 딸, 몸이 불편한 아버지. 매일매일 가족을 위해서 싸워야 하는 전쟁터 한복판에 놓여 있는 현실.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도망치거나 견뎌내는 수밖에. 로맨티스트는 죽음으로 도피하고, 리얼리스트는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니 추악한 삶 자체를 받아들이라고 하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는 멀티 메타 유니버스의 혼돈과 경험을 통해서 가족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현실로 귀환합니다. 주제는 가족애입니다. 그런 익숙한 주제를 버스 점핑(Verse Jumping), SF. 코믹, 액션, 호러, 명장면에 대한 오마주까지 뒤섞어 구현하는 거죠. 스토리에 몰입되지 않는 건 요란하고, 산만하게 극적 전개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러한 장면들이 더 사실적으로 여겨지는 건 우리의 삶에서 전조도, 기척도 없이 불쑥 사랑이 급습했다가 청천벽력 같은 이별과 죽음으로 아픔을 주기 때문이기도 하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의 낯선 매력     


  첫째, 익숙한 서사를 통해서 던지는 고정관념의 힐링이 아니라 메타적 장면과 멀티버스, 그리고 만화 같은 감성으로 위로를 건넵니다. 뜨거운 걸 먹고 속이 시원하거나 아주 매운 음식을 먹었는데 뒷맛이 개운한 느낌이랄까, 그런 거죠.      


  둘째, 영화를 보는 내내 그동안 봤던 온갖 영화의 장면들이 떠올라 영화를 더 풍성하게 해 줍니다. <마스크>와 <닥터 스트레인지> 같은 요란한 씬 전환, <매트릭스>와 <인셉션>처럼 가상현실과 잠재의식을 넘나드는 철학적 세계관, <와호장룡>, <펄프 픽션>의 오마주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영화가 다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산만하고 요란한 장면을 서사적으로 연결시키려고 하지 말고, 그냥 즐기시면 됩니다.      



  셋째, 베이글이나 바윗돌, 그리고 가짜 눈 같은 메타적 장면은 시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의 시선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 있는데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영화적 메시지가 변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과 지적 형태, 혹은 취향에 따라 다를 뿐이죠.      


  넷째, 극적 대사가 영화적 주제와 캐릭터를 명쾌하게 정리해 줍니다.  

    

  웨이먼드 : 다중 우주의 무한한 힘과 지식을 자유자재로 쓰면서 너무 많은 걸 봐서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과 도덕관념을 잃고 말았지.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려놓는 것, 그게 알파버스의 사명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조부 투파키의 혼돈에 맞설 사람부터 찾아야 돼.   

  에 블 린 : 그게 나라는 거야?

  웨이먼드 : 그러니까 목숨 걸고 당신을 구하려는 거지.      


  버스점프를 하는 건 자신의 딸인 조이를 지켜야 하는 부모의 당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가족이 함께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는 결국 관객인 나 자신의 이야기로 환원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겪고 있는 현실이 아주 보잘것없어도 지금의 이 현실 이외의 모든 가능성은 다 욕망의 무덤에 묻힌 거나 다름없죠. 그러니까 모든 것(everything)을 보고, 모든 장소(everywhere)를 경험한 뒤, 지금 단 한번(all at once) 현재의 자신이 우주적인 의미를 지닌 존재로서 깨달음에 다다른 겁니다. 그게 단순한 자기 위안의 정신승리가 아니라 알파 우주 속에서 질풍노도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을 겪고, 서사적 상처와 혹독한 어려움을 극복한 뒤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자각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공시를 준비하든, 택배를 하든, 세일즈를 하든, 나사를 깎든, 토마토를 키우든, 아줌마든, 아저씨든 당신이 우주의 중심인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결코 시시한 인생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여섯째, 연기자의 이력이 새삼 빛나 보입니다. 에블린 역을 맡은 양자경이 벌써 순에 접어들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예스 마담>, <와호장룡>, <007 네버다이>에서의 액션은 정말 시원시원했죠. 웨이먼든 역을 맡은 키 호이 콴은 어린 시절 <인디에나 존스 : 마궁의 사원>과 <구니스>에 출연했죠. 뒤늦게 다시 연기를 시작한 그의 용기와 의지가 대단합니다.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 역을 맡은 제이 미 커티스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트루 라이즈>에서 섹시한 아줌마의 모습을 보여줬죠. 아널드 슈왈츠 제네거와 함께 출연했던 게 기억납니다.           


  3월에 다시 극장에서 재개봉한다고 합니다.

  80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도 작품상을 비롯해서 5관왕에 올랐죠.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명단에 11개 후보로 이름을 올렸는데 몇 개나 수상할지 궁금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신춘문예, 잔치는 끝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