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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Feb 20. 2023

평범한 관객이 본 <바빌론>

- 그래도 한 번쯤 이런 영화는 봤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이 연출했거나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보러 갈 때는  기대가 됩니다. <바빌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플래시>와 <라라랜드>를 연출한 데미안 셔젤 감독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남아 있고,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가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거기다 메타포가 담긴 ‘바빌론’의 제목에서 풍기는 마력도 시선을 끌었습니다.

  고대 역사물도 아닌데 바빌론이라니.    


  <바빌론>은 하나의 사건에서 갈등이 시작되고 절정으로 치닫는 플롯이 아니라 여러 인물의 에피소드를 묶어 할리우드의 이면을 보여주는 평면적인 구성방식의 영화였습니다. 관객이 해독해야 할 만큼의 은유적 씬도 없고, 논리적 추리를 해야 하는 인물관계도 아닙니다.

  촌뜨기지만 세상에서 좀 더 스케일이 거대한 일을 하고 싶은 청년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와 은막의 스타를 강렬하게 열망하는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그리고 무성 영화시대의 스타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가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인물입니다. 세 인물의 캐릭터는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영화에 대한 열정과 욕망을 품고 있죠. 그들이 품고 있는 열정과 열망이 영화의 기술적인 대변화로 인해 혼란을 겪고, 때로는 폐기처분이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건 꿈을 만들어 관객이 그 꿈을 대리체험하고, 때로는 실현해주는 배우들이 정작 자신들은 추악하고, 혐오스럽게 타락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죠. 영화는 영화일 뿐 인생이 아니니까요. 스크린 밖에서는 욕망과 세상의 중력을 견뎌내야 하는 건 배우나 관객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바빌론>은 무성영화 시대에서 유성영화로 시대로 접어드는 대변환시기에 배우들이 겪는 혼란과 좌절, 그리고 파멸하면서까지 끝끝내 영화를 품고 장렬하게 산화하는 인생스토리로 환원이 됩니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건 <바빌론>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현존하고 있고, 여전히 드림메이커가 주는 기쁨과 슬픔의 마력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바빌론>을 보면서 느낀 점

  첫째, 타이틀이 뜨는 건 영화가 시작된 지 31분쯤이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는 제작자, 연출자, 주요 출연배우를 소개하는데 BABYLON, 단 세 글자뿐이었습니다. 뭔가 뜻이 있었겠죠?


  둘째, 무성영화 시대의 제작현장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게 마치 다큐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8:00 9:00 10:00 11:15 런치 2:55 3:30 5:16 5:27 5:48. 무성영화 시대는 시간대별로 생생하게 촬영장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유성영화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 1927년, 1928년, 1932년처럼 연대별로 넘어갑니다. 미시적인 장면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른 거시적인 장면으로 시점이 이동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려는 것으로 이해됐습니다.


  셋째, 조연들의 씬 스틸러 두 장면이 있습니다. 페이 주가 담배를 피우며 등장하는 장면은 거의 완벽한 시에 가깝습니다. 담배 하나가 인물과 주변 상황이 압도하는 장면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넬리가 매니와 함께 요양원에 면회를 갈 때 그의 어머니인 듯한 캐릭터는 한 마디 대사도 하지 않고 단지 얼굴표정 하나로 관객의 숨을 멈추게 합니다. 얼굴에 수 만 가지의 사연이 켜켜이 담겨있는 표정, 잊어지지 않습니다.



  넷째, 마고 로비의 스타가 되기 위한 광기에 가까운 열망과 집착의 눈빛도 가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아이, 토냐>에서 토냐 하딩 역을 맡아 은반 위의 악녀를 섬뜩하게 보여줬던 그 눈빛이 더 독해졌습니다.

 

 다섯째, 브래드 피트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죠. 가슴을 먹먹하게 했던 건페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미 바닥으로 추락한 자신의 인기와 처지를 처연하게 담아낸 얼굴표정이었습니다. 이어서 담배를 가지러 간다고 하면서 자신의 객실로 올라가 권총자살을 하는 장면, 이를 2분 가까이 롱테이크로 찍었습니다. 계단을 쓸쓸하게 오르고, 어두운 객실 통로를 어깨를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듯 걷는 장면은 정말 먹먹하게 습니다. 스타의 몰락은 신전이 무너지는 것만큼이나 아픕니다. 피아노 선율과 조응되는 브래트 피트의 연기는 한 편의 절명시였습니다.

  또한 그가 계단을 오르며 웨이터와 나누는 대사도 빼놓을 수 없죠.      


  잭 : 최고로 많이 받았을 때, 얼마나 받았나?

  웨이터 : 50달러요.

  잭 : 누구한테 받았지?

  웨이터 : 콘래드 씨가 주었습니다.

  잭 : (돈뭉치를 통째 건네며) 이거 다 받아. 이젠 네가 미래다.    



  여섯째, 영화 전반에 걸쳐 데카당스 한 패션과 무대, 그리고 하드코어의 마약, 강렬한 광란의 몸짓이 이어지지만 중세 전투장면을 찍는 감독 역을 맡은 스파이크 존스(<존 말코비치 되기> 연출)와 도박장 보스 맥케이 역을 맡은 토비 맥과이어의 연기도 거의 광기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계산하지 않고 어느 한곳에 집중하고, 열망한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일곱째, 뮤지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OST가 귀를 즐겁게 합니다. 재즈와 오페라 아리아를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사운드와 화려한 연주에 그냥 본능적으로 온몸의 감각이 저절로 반응합니다. 트럼펫 하면 윈턴 마살리스와 마일스 데이비스, 앨리슨 발섬, 쳇 베이커 같은 연주자가 떠오르지만 영화를 보면서 팔머도 그들 못지않다는 걸 느꼈습니다.


  여덟째, 이 영화의 매력 중 빼놓을 수 없는 건 목덜미를 후려치는 강렬한 대사들입니다.     

   

  잭 콘래드의 대사.

   “탱크에 기름 넣던 남자들이 왜 영화를 보러 갈까? 왜? 왜? 왜?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외로움을 덜 느끼니까.”      


  “혼자 연주하고 있던 헝가리 여자 있잖아. 생각해 봤는데, 그녀를 사랑하는 것 같아. 그녀 사무실로 매일 아침마다 장미 2백 송이씩 보내,”

  “그녀가 영어 못하는 건 알고 있죠?”

  “사랑에는 그딴 거 필요 없어!”     


  잭 콘래드가 자살하기 직전에 자신의 영화에 악평을 쓴 앨리노어(진 스마트)를 찾아가 나누는 대화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압축돼 있습니다.     

 

  잭 : 왜 이딴 식으로 휘갈겼는지 묻잖아요.

  앨리노어 : 아니, 넌 관객들이 왜 네 영화를 보고 웃는지 궁금한 거잖아. 내가 얘기해 줄까?

  잭 : 왜 웃을까요? 말해줘요. 왜죠?

  앨리노어 : 왜라고 물을 수 있는 문제가 아냐. 네 목소리도 아니고, 네 연기력도 아냐. 확실히 내가 지적했던 것들도 아냐. 네가 더 이상할 수 있는 건 없어. 더 이상 없다고. 그냥 네가 활동하던 시대가 지난 거야.   

  

  앨리노어 : 백 년이 지나고, 너와 나 모두 이 세상에 없을 때 어느 누구든 네 작품을 보게 되면 그때 당신은 다시 부활하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지? 언젠가 지금의 모든 영화제작자들이 이 세상에 없을 때, 지금의 영화들이 모두 기억에서 사라질 때쯤 말이야. 모든 유령들이 다시 모여 얘기하고, 모험하고, 전쟁을 치르고 시간이 흐를 대로 흘렀을 때쯤 50년 뒤에 태어날 한 아이가 당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는 순간 넌 마치 그를 알았던 것처럼, 친구처럼 그가 처음으로 숨을 쉬기 전 당신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지만 넌 선물 같을 거야. 그것도 아주 멋진. 지금은 한물갔지만. 넌 천사와 유령처럼 영원히 존재하는 거야.

  잭 :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아홉째, 인간에게 화려한 죽음이란 없습니다. 잭도 그렇고, 그를 혹평했던 앨리노어와 넬리의 죽음도 신문의 일단 기사로 간략하게 보도될 뿐이죠. 그래도 세상에 시시한 인생은 없습니다. 시시하다고 여기는 아주 시시한 사람들만 있을 뿐이죠.      


  열 번째, 유성영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영화 촬영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살벌하게 보여줍니다. 넬리가 방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씬 17을 찍을 때 갖가지 소음 때문에 테이크7까지 찍게 되죠. 배우도 스텝도 거의 미쳐 버립니다. 녹음 기계실 엔지니어는 더위에 사망까지 합니다. 이 장면의 시간이 12분이나 됩니다. 반복에 반복으로 관객도 지칠 정도입니다. 조감독이 마더퍼킹 사운드라고 소리치는 게 이해됩니다.


  열 번째,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에 많은 영화를 만나게 됩니다. 소소한 즐거움입니다. <씽잉 인 더 레인>, <벤허>,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아바타>에 이르기까지. 저는 개인적으로 잭 콘래드가 글로리아 스완슨과 통화하는 장면이 반가웠습니다. 왜냐하면 무성영화 시대의 한물 간 여배우가 자의식 과잉으로 미쳐서 파멸해 가는 <선 셋 대로>의 여주인공이 글로리아 스완슨이었고, 그 영화는 저의 최애 무비 중 한편이기 때문입니다.        


  사족 - 아이스크림에 토핑을 얹는 건 아이스크림을 망치는 것과 같다는 넬리의 말처럼 인생에 쓸데없는 짐을 싣고 살지는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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