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반드시 봐야 할 영화도, 들어야 할 노래도, 읽어야 할 소설 같은 건 없습니다. ‘쉬페르비에르 詩를 읽어도 좋고, 김승옥의『서울 1964년 겨울』을 읽어도 좋지만 하나도 안 읽어도 좋다.’는 황지우의 시「몬테비데오 1980년 겨울」의 한 구절처럼 어떤 소설은 읽으면 좋지만 읽지 않아도 세상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읽었다고 해서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고, 읽지 않았다고 해서 치명적인 흠결이 되는 것도 아니죠. 맞선을 보거나 소개팅을 하는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한씨연대기』를 읽지 않았다고 해서 상대로부터 퇴짜를 맞는 경우는 더더욱 없습니다. 밥 딜런의 노래를 듣지 않고,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한들 소화불량이 될 일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왜 소설을 읽고, 어떤 소설을 읽고 났을 때 그 작가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걸까요?
김훈 선생님의『하얼빈』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내 마음속에 잊고 있었던 부채를 깨달았습니다. 너무 많이 들어왔던 익숙함으로 인해 당연했던 것으로 받아들인 안중근 의사의 삶. 그걸 잊고 살았던 거죠. 원고지에 연필로 꾹꾹 눌러쓴 김훈 선생님의 노고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역사의 현장을 순례하고, 고인과 조우하는 과정이었고, 제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칼의 노래』를 읽을 때는 『난중일기』의 숨결과 당대의 서사가 느껴지고,『남한산성』을 읽을 때는 『병자록』의 기록과 서사가 마음을 짓눌렀는데 『하얼빈』또한 그런 느낌과 유사했습니다. 소설을 읽은 뒤에 열강의 패권주의가 세계사의 정의가 되는 모순의 시대를 권총 하나로 깨부수는 안중근의 삶은 박제된 위인이 아니라 실존적인 인물로 부활합니다. 폭력과 야만에 대한 온몸의 저항을 관념과 추상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고민과 의지를 라이브하게 보여줍니다. 『하얼빈』은 소설은 읽지 않아도 좋다는 논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게 소설의 힘이겠지요.
인간은 먹고 자고 싸는 생물학적인 미물에서 읽는 존재가 될 때 영장류로서의 숭고한 정신을 지니게 된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