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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Mar 22. 2023

봄날의 유령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으며

  황도를 따라 느리게 걷는 태양. 봄의 걸음이 분명합니다. 슬픔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밝은 시간. 적당한 표정으로 슬픔의 감정을 대체하려 했지만 슬픔의 근원을 잃어버렸고, 할 일이 떠올랐습니다.

  비타민제를 먹고 나니 아랫배가 든든했고, 갑자기 알통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팔뚝에 힘이 넘쳐 종이비행기를 날렸습니다. 온 우주가 실려 비행하는 걸 바라보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비행사자격증을 따볼까요?

  요즘은 편의점에 들어서면 1+1 상품에만 시선이 갑니다. 이러다 내 인생도 누구한테 묶여서 덤으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요?


  은행통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변태괴물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어떤 괴물은 교통경찰이 딱지를 끊듯 스티커를 발부합니다. 칼을 들었던 스티커를 끊던 다 이유가 있겠죠. 그래도 모른 척 바나나 우유를 배 터지게 마십니다. 아무래도 비타민제를 과다 복용해서 간이 부은 것 같습니다. 한번 부은 간은 평생 간다는데 그게 팔자라면 받아들일 수밖에요. 천하태평이라고요? 세상에 자신의 인생만큼 리얼한 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유령의 집처럼 늘 비어있던 마당에 잘 벼려진 봄볕이 무더기로 쏟아집니다. 여호와 증인 전도사도 좋고, 달걀장수도 좋고, 고물장수라도 들어서면 반가울 것 같습니다. 냉장고에 바나나 우유가 있거든요.  

  글을 쓰다 보면 문장으로 복원되는 낡고 초췌한 추억들. 부끄러움이 묻어나기도 하죠. 왜곡과 착각이 있었기에 견뎌온 삶. 앞으로도 왜곡과 착각이 삶을 이어줄까? 어림없지.


  천박한 유행 같은 힐링과 위로에 매몰돼 패기와 열정을 잃어버린 걸 훈장처럼 달고 있는 젊은 날의 서사를 다시는 볼 수 없게끔 봉인해 버릴 겁니다.

  소소한 일상의 기록이 자기만족의 언어적 자위행위가 되지 않기를!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으며 봄에 빠져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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