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로판지 필름에 빛의 세상을 그리고 싶었던 드림 메이커의 꿈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죠. 99.99%의 사람들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엔지니어가 되든가 샐러리맨 혹은 아줌마나 아저씨가 되어 그저 관객으로 남아 있을 뿐이죠. 감독이든 배우든 원했던 걸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은 추억의 무덤에 묻혀 가끔 아쉽고 씁쓸하게 소환되기도 합니다.
‘아 그때, 연극영화학과로 갔어야 하는 건데.’
영화 <파벨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감춰져 있던 가족사와 상처 입은 그의 성장 과정이 어우러진 자서전적인 영화입니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영웅은 스크린을 통해 수없이 봐왔지만 감독이 자신을 캐릭터로 내세워 오롯이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건 흔치 않죠. 까딱하면 다큐가 되든가 아니면 감정 과잉의 자기 위로 드라마가 되기 십상입니다. <파벨만스>가 감동으로 와닿은 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어린 시절 가졌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삶의 여정이 자기 고백에 머무르지 않고, 인생을 통찰하는 완성도 높은 영화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영화의 꿈을 품고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조언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춘천 CGV에서는 3월 22일 오후 1시가 첫 상영이었는데 관객은 열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풍성하게 스크린에 몰입할 수 있었죠. 엔딩 크레딧, 맨 마지막 ‘For Leah’라는 그의 어머니에 대한 헌사가 올라갈 때까지 존 윌리암스의 OST를 들으며 여운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는 즐거움은 이런 소소한 걸 맛보는 거죠.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와닿았습니다.
<파벨만스>를 보면서 공감이 가고, 감동이었던 장면들
첫째, 새미가 어린 시절 엄마 미치(미셀 윌리암스)와 함께 세실 B. 드밀 감독의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나서 기차와 차가 충돌하는 영화 속의 씬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끝내 집안에 레일을 깔고 장난감 기차와 차를 충돌하는 걸 카메라로 직접 찍는 장면에서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안 돼!’ ‘하지 마!’의 단세포적인 억압이 아니라 아이에게 상상력을 실제로 경험해보게 하고 동시에 함께 공유하는 것, 그게 어른의 역할이죠. 정말 부러웠습니다.
둘째, 가족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고, 가족들은 자신의 역할과 존재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 가족은 운명적인 혈연으로 묶어지는 게 아니라 슬픔과 기쁨, 갈등과 화해로 만들어가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셋째, 카메라로 가족의 일상을 담아내면서 엄마 미치가 아버지 버트(폴 다노)의 동료이자 친구인 베니(세스 로건)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눈치챈 새미가 그 사실을 말로 하지 않고 두려움과 배신감을 꾹꾹 누르고 화면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특히 엄마 미치에게 새미가 아버지 버트한테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건 미치가 두려워하는 것만큼이나 자신도 두려워서 그랬겠죠. 그런 사실이 드러나면 어떤 비극적 결과가 올 것인지는 어린 새미도 충분히 알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비도덕적인 열정의 비밀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재채기를 참을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의 열병 또한 억누를 수 없죠.
넷째, 예술적인 정서와 감정이 넘치는 미치와는 달리 엔지니어의 냉정한 사고와 행동을 하는 버트. 완벽한 조합처럼 보였지만 그건 의무감으로 치장된 것이었죠.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도 베니에 대한 미치의 열정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버트 또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당위성이 가정을 지켜내는 방파제가 되진 못하죠. 미치와 버트는 그렇게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고,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러한 아픈 가족사를 드러내는데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파벨만스>가 감동을 주는 건 그런 가족의 상처와 인생에 대한 통찰이 영화적으로 완벽하게 표현됐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셀 윌리암스와 폴 다노의 표정과 연기가 그 모든 걸 담아내고 있습니다.
다섯째, 새미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카메라 촬영을 하면서 미치와 베니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게 된 후 카메라 자체에 환멸을 느낀 새미는 영화에 대한 모든 걸 포기합니다. 카메라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카메라를 베니로부터 선물을 받았지만 처박아놓은 채 손도 대지 않죠. 그리고 전학 간 고등학교에서 유태인이라고 놀림과 왕따를 당하면서 시련을 겪지만 그의 여친인 모니카가 최신형 16mm 카메라를 빌려준다고 했을 때 동공지진이 일어나죠. 새미는 고작 8mm 카메라만 써왔기 때문입니다. 최신형 16mm 카메라는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새로운 동력이 됩니다. 결국은 학교 행사의 프로그램으로 멋진 작품을 만들어 그에게 폭력을 가했던 친구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합니다. 새미에게 카메라와 영화는 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를 자신이 통제하는 멋지고도 유일한 수단이었던 거죠.
여섯째, 새미의 외삼촌으로 출연한 주드 허쉬의 연기도 시선을 끕니다. 영화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영화인의 잠언 같은 대사를 던지죠.
“우리는 중독자야. 예술은 우리한테 마약이지!”
일곱째, 새미가 본격적으로 영화판에 뛰어들었을 때,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서부극의 거장 존 포드 감독(데이비드 린치)입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카메오 출연이지만 그의 대사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평생 만들어온 영화의 중심축이자 신념으로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몇 시간을 기다린 뒤 사무실에서 만난 존 포드 감독이 벽에 걸린 스틸 사진을 가리키며 지평선이 어디 있냐고 거칠게 묻죠.
“빌어먹을 지평선이 어디 있냐고?”
우물쭈물 하며 버벅대는 새미에게 벼락처럼 말합니다.
“지평선이 바닥에 있으면 흥미로워. 지평선이 맨 위에 있어도 재미있지. 그러나 지평선이 중간에 있으면 엿 같이 지루해져.”
존 포드 감독에게 그 말을 듣고 밖으로 나온 새미는 朝聞道 夕死可矣(조문도 석사가의) 같은 표정을 짓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생이 시작되는 거겠죠.
우리는 왜 여전히 영화에 열광하는 걸까요? 거기에는 꿈과 영혼,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 같은 인생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영화를 보고 내려오다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이가 나에게 어떤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물었는데 그 젊은 친구가 이 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