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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Aug 22. 2023

오펜하이머를 위한 변명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Ⅰ. 트리니티는 파멸의 씨앗     


우주의 기운을 모아 만든 리틀 보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사냥꾼들은

사냥할 준비를 끝내고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산이 부르르 떨고, 하늘마저 통곡하는데

오직 피맛을 보려 입맛을 다실 뿐.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들은 따끔하게 혼이 나야 돼!”

천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버섯구름이 떠오르고,

모든 게 무너진 아비규환의 핏빛 제단에서

그들은 축제의 샴페인을 터뜨린다.

괴물을 쓰러뜨리려고 스스로 괴물이 된 오만한 자의 시간은

이제 중심을 잃고 늪으로 빠져들 것이니.

핵분열과 핵융합의 연쇄반응은 시간문제일 뿐.  

사냥꾼들은 적당한 목적으로 꾸려진 소모품이고

정의와 신념은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걸까.

누군가는 아메리칸의 프로메테우스라 하고,

누군가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렀지만      

행위가 초래할 결과와 그 행위를 회피함으로써

초래될 결과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인지했음에도

멈추지 않았으니 그 업보는 후세에 두고두고 남으리.

더구나 파멸의 세계가 눈앞에 닥치고,

피로 물든 날들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니      

파괴의 면류관은 순전히 그의 몫이다.

내 자신이 손에 피를 묻힌 건

무질서의 회복과 평화의 갈구 때문이었다는 게

틀린 것도 아니지만 맞는 것도 아닌 자기모순의 말잔치일 뿐.

종전이 끝이 아니라 연쇄적인 파괴의 문을 열어젖혔으니

그의 뉘우침도 다 소용없게 돼 버렸다.

적개심만으로 들끓는 척력의 시대에 사냥꾼들은 더욱 열정적이고,  

우리들은 길을 잃고도 여전히 천하태평이다.



Ⅱ. 오펜하이머의 고백       


정체성에 자신이 없다, 핫도그 가게 운영도 하지 못할 위인이다,라고 한 사람들의 말. 맞아요. 하지만 그들은 나, 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지적인 열정을 간과했어요. 열정은 그것이 결과를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그 자체로서 지속성을 갖게 하는 힘이 있거든요. 에너지인 셈이죠. 그로브스(맷 데이먼)는 그걸 알아봐 줬어요. 그가 MIT를 나온 건 그만한 지식과 혜안이 있다는 거죠. 천박한 구두판매원 출신인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죠. 스트로스는 아부를 했고, 그로부스는 내게 맞는 대우를 해준 거였어요. 나는 비범한 자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요. 비범함 자들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죠.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건널 수 없는 강 같은 게 바로 비범한 거죠. 논리로는 설명이 안 돼요. 처음부터 불가해한 운명은 서로 갈 방향이 다르다는 걸 알려줄 뿐이죠. 평범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편견조차 내게는 중심을 잃지 않게 해주는 균형추였어요. 비범한 자들은 계산도 잘 하고, 예지력도 있죠. 그걸 경멸해선 안 돼요. 때로는 그런 예지력 때문에 신의 미움을 받고, 파멸이 되기도 하죠. 하지만 그것조차 위대한 파멸이죠. 비범한 자들은 그 어떤 것도 공유할 사람이 없어요. 온전히 그의 몫일 따름이죠.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겁니다. 사랑도 그렇죠.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느냐? 선택에는 배제가 따르고, 한 여자를 사랑하는 건 다른 여자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고 하지만 그건 그 어떤 탈출구도 찾지 못하고 일상의 감옥에서 숨막히게 살아가는 무능한 자들의 자기위안일 뿐이죠. 내 역동적인 사랑을 숨길 수 없고, 다층적인 감정선도 거세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돈만 있고, 정해진 길로만 간다면 인생은 쓸쓸하고 부질없는 거죠. 물론 내 말과 행동이 모순된다는 것도 알아요. 헌데 일상이 나에게 헌신하지 않기에 나 또한 일상에 모든 걸 맹종할 순 없죠. 정말 또 정말 고민이 되면서도 리틀 보이를 기꺼이 만든 건 도덕적 정당성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거였어요. 나의 알량한 고민과 나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말이 수많은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는 알리바이로 내세우는 위선일 뿐이라는 지적도 충분히 알아요. 나의 지적인 오만과 편견, 그리고 과시욕에 휩쓸렸던 무지의 순간들. 그래요, 진짜 삶은 삶이 끝난 뒤에도 그 빛이 드러나는 법이죠. 그게 진실입니다. 그래서 고백하잖아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Ⅲ. 스트로스의 고백     


가식도 지극하면 진짜로 보여. 가짜와 구별이 되지 않지. 오펜하이머는 그런 속물이야. 지식을 무기로 명예를 얻으려고 한 거지. 나는 그와 다르지. 구두 판매원으로 자수성가했잖아. 여기까지 올라오는 덴 그냥 된 게 아냐. 자신만의 서사가 없다면 그건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자신의 서사가 있는 자가 최후의 생존자가 되거든. 내 서사를 만든 건 동물적인 감각이야. 동물이야말로 직관적으로 사물의 적합과 부적합을 미리 아니까. 경계심과 의심은 유일한 방어수단이지. 오펜하이머는 철부지였어. 거기다 오만했지. 사람을 우습게 보는 나쁜 버릇이 있었거든. 그는 지식의 힘을 믿는 미신을 가지고 있었지. 힘이 세상을 바꾸긴 하지만 힘을 사랑하는 자보단 사랑의 힘을 가진 자가 훨씬 아름답지. 어쨌든 오펜하이머 때문에 내 계획은 다 박살 났어. 정말 멋지게 살고 싶었는데. 멋지게 말이야. 그가 나에게 했던 것만큼 나도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지. 그게 서로의 심장에 창을 찌른 결과가 되고 말았지만. 현명한 행동은 아닌 게 분명해. 사랑하진 못했더라도 미움을 안고 살지 않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이미 다 지난 일. 떨어지는 것을 늦추면 내려오는 것이고, 내려오는 것을 빠르게 하면 추락이라고 하지. 우린 서로를 추락시킨 거야. 더 이상 할 말 없어. 단지 우리는 변명이 너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뿐.           


  추신 –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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