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교수의 <미학 오디세이>를 섭렵하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뭐랄까. 학부시절로 되돌아가 예술론 교양강의를 듣다가 나중에는 거대한 전시회에 빠져든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미학 오디세이>는 단순하게 통사적으로 예술사를 개관한 게 아니라 ‘가상과 현실’의 개념을 키워드로 해서 그 특징이 고대로부터 현대예술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드러났는가를 서술하여 예술의 이해에 대한 응집력과 집중도를 높여주었습니다. 더구나 그게 백과사전적인 나열에 그치지 않고, 진중권 교수의 독특한 화법과 때로는 독설과 야유까지 섞여 있어 재미를 배가 시켰습니다.
진중권 교수는 여전히 예술에 대한 집필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겐 좌우 진영을 가리지 않고, 독설을 날리는 논객으로 더 알려져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정치는 허업이라고도 하고, 멍청한 자들이 이름을 파는 쇼 비즈니스라고도 하듯 정치를 비판하는 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습니다. 정치가를 비판하는 건 노력하지 않고도 욕하듯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건 더 허망한 일이죠. 더구나 정치가들은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그 기능이 삭제됐거든요. 그런 점에서 진중권 교수께서 플랫폼을 만들어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예술론 강의를 하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차고 흘러넘치던 그의 젊은 날에 근거 없는 질투와 시기가 일었고, 더불어 존경하는 마음도 함께 했습니다.
<미학 오디세이 3> 가운데 인상에 남는 부분이 있어 그대로 소개해드립니다.
예술의 공모
한 화가가 실수로 캔버스에 칼자국을 낸다. 그런데 그 모습이 보기에 제법 괜찮다. 그는 원래의 작업을 포기하고, 이 작품(?)을 그대로 출품하기로 한다. 전시회 관계로 비평가가 그의 아틀리에에 들른다. 비평가는 그게 별것 아님을 뻔히 안다. 혹평을 해서 나무랄까? 아니면 그것을 미술사의 획기적인 작품으로 만들어줄까? 그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작품의 속성이 아니라 그 작가가 그에게 베푸는 대접의 함수다. 그날 분위기, 괜찮았나 보다. 다음 날 신문 문화란에는 이런 평이 실린다.
21세기 화단의 앙팡테리블(enfant terrifle) 작가 J씨. 회화의 형을 탐색하는 데에 주력해 왔던 그가 최근 그가 형을 초월하여 형이상으로 비약하고 있다. 화폭에서 보이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날카로운 칼 자국뿐이다. 여성의 성기를 닮은 저 캔버스의 틈은 언젠가 모든 존재자를 낳은 세계의 자궁이다. 찢어진 틈으로 입을 벌린 저 어두운 존재의 심연을 보라.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가 저기에서 충격적으로 시각적 직관성에 도달한다.
물론 비평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쓴 사람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긴, 원숭이 그림도 이해가 되는데 사람이 쓴 글이 왜 이해가 안 되겠는가. 깊은 형이상학적 감명을 받은 변호사 K 씨. 작품을 구입하기로 마음먹는다. 예술가는 그에게 5000만 원을 요구했고, 그는 한 푼도 깎지 않고 선선히 수표를 끊어준다. 마침내 이 ‘공모’의 희생자가 생겼다. 5만 원짜리 캔버스를 5000만 원을 주고 산 변호사 K 씨.
하지만 K라고 인생을 허투루 살겠는가. 그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 그 역시 평론가의 말이 허튼소리에 불과함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미술 바닥에서 저 유명한 비평가의 말은 헛소리도 곧 현실이다. 게다가 그 작품은 신문에 났던 것. 그것만으로도 상징자본이 붙는다. 게다가 그가 작품을 산 더 절실한 이유가 있다. 그것을 더 높은 값에 되팔 수 있다면, 5만 원짜리 캔버스라도 얼마든지 5000만 원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술계라는 시뮬라시옹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이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