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지로버를 몰고 다니며 인력시장 근처에서 사람을 찾고 있는 중년 사내 바디. 자살을 한 뒤 자신의 시신을 구덩이에 묻어줄 조력자를 구하는 중입니다. 공장 근처에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는 젊은이에게 돈을 주겠다고 접근하자 그는 버럭 화를 냅니다. 이번에는 UCLA 티셔츠를 입고 쓰레기장에서 비닐을 주워 가족을 먹여 살리는 사내에게 말을 붙입니다. 일을 도와주면 돈을 주겠다고 하자 그 사내는 자신은 폐품과 비닐을 줍는 기술밖에 없다며 수줍게 단칼에 거절하죠.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의 정서가 한 장면에서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근거 없이 내미는 돈을 덥석 받는 건 악마와 거래하는 거죠.
첫 번째로 바디의 레인지로버에 탄 사람은 외출했다가 귀대하는 훈련병입니다. 부대까지 태워주겠다는 호의를 베푼 거죠. 훈련병은 너무 많이 걸어 피곤했던 터라 차를 탑니다. 바디는 훈련병이 군대 오기 전에 농사를 지었고, 아홉 명이나 되는 가난한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고통에 찌든 삶인 거죠. 바디는 훈련병에게 단 10분 만에 6개월 치 월급을 받을 수 있다며 자신이 자살하면 시신을 나무 옆의 구덩이에 묻어달라는 제의를 합니다. 훈련병은 돈이 필요하지만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바디는 생매장하는 게 아니라 삽질 스무 번쯤 해서 시신을 묻는 거라며 계속해서 설득을 시도하죠. 결국 훈련병은 차 문을 열고 적진에서 탈출하듯 냅다 도망칩니다.
두 번째로 공사장에서 만난 신학대생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를 합니다. 바디는 고단한 인생을 끝낼 때가 됐다며 자신이 자살한 뒤 그 시신을 구덩이에 묻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물론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죠. 신학대생은 인간의 자살은 육신을 학대하는 것이며, 그것은 코란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며 거부합니다. 종교적 논리로 설파하죠. 바디는 신학대생에게 설교나 관심, 동정이나 고통의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라 단지 자신의 시신을 묻어달라는 것이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레인지로버에 탄 사람은 자연사박물관에서 근무하는 박제 전문가 노인입니다. 노인은 당장 아들의 병원 치료비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주면 돈을 주겠다는 바디의 제의를 노인은 들어주겠다고 허락하죠. 하지만 자신도 한때 자살하려 했다는 경험을 들려줍니다. 목에 맬 끈을 가지에 걸려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가 거기에 달려 있는 달콤한 체리를 맛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몰려들어 나뭇가지를 흔들어달라고 합니다. 노인이 나뭇가지를 흔들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체리를 주워 먹습니다. 노인은 그 체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줍니다. 맛있게 먹는 아내를 보며 노인은 행복을 느끼게 되죠. 노인은 체리가 자신을 구한 게 아니라 자신이 변한 거라는 말을 합니다.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과 가정은 없으며,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노인이 차 안에서 바디에게 하는 말은 관객의 마음으로 파고듭니다. 빙글빙글 돌던 도로에서 노인은 바디에게 새로운 길로 가자고 제의합니다.
노인 : 좌회전해주세요.
바디 : 나는 이 길 모르는데.
노인 : 나는 알아요. 돌아가는 길이지만 편하고 아름다워요.
가지 않은 길은 두려움, 편견, 왜곡, 불신, 고정관념 같은 것들로 가득하죠. 노인의 말은 그런 것을 불식시킵니다. 강요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 때문이죠. 또 막상 새로운 길로 들어서면 삶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기도 하고요.
다음 날, 어둠 속에서 바디는 레인지로버에 시동을 걸고 노인과 약속했던 그 산길로 갑니다.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들어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별빛이 눈에 들어옵니다.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 향기>를 인생영화로 여기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많은 팬들이 생겼죠. 아주 투박한 느낌이 드는 <체리 향기>가 우리한테 주는 감동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이 영화의 매력 몇 가지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바디가 삶의 종점에서 희망을 찾게 된 것은 젊은 훈련병이나 신학대생이 아니라 박제 전문가 노인입니다. 특히 박제 전문가는 살아있는 새를 죽여 전시용을 만드는 직업인데 그런 노인으로부터 바디가 영혼 구제를 받은 것은 아이러니죠.
둘째, 특이한 편집입니다. 영화를 본 분들은 영화를 보는 중 갑자기 차 안에서 노인이 바디의 제의를 받아들인 말이 튀어나와 잠시 당황했을 겁니다. 편집이 잘못된 거 아냐? 아닙니다. 차를 타는 과정이나 바디가 제의를 한 과정이 이미 다 생략된 채 노인이 말이 들리는 거죠. 그리고 차 안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은 노인입니다. 노인 이전의 훈련병과 신학대생에게는 바디가 혼자 주도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는데 그 상황이 역전이 된 거죠. 바디가 훈련병과 신학대생과는 단절된 관계에 놓여있었다고 하면 노인과는 공감하고 소통하는 관계가 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디가 구덩이에 들어가 누워서 하늘의 별빛이 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별은 희망이죠. 시인 윤동주도 별을 순수한 희망으로 노래했으니까요.
셋째, 그 흔한 OST가 없습니다. 배경음으로 들리는 것은 개의 비명, 개 짖는 소리, 망치 소리, 코란 경전을 읊는 소리, 덤프트럭 소리, 헬리콥터 소리, 경찰차 소리, 군인들 구호 소리입니다. 거의 소음에 가깝습니다. 그런 소리로 가득 차있는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일 테죠. 군인들 엑스트라가 화면에 가득 차고 그때서야 흥이 나는 브라스 밴드의 음악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넷째, 바디가 구덩이 속에서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는 게 엔딩 씬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감독과 카메라맨과 스텝들이 화면에 등장하는 건 생전 처음 보았습니다. 나중에는 엑스트라까지 전부 나오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건 이후입니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 건데요. 이런 스크린의 문법이 있었던가요? 이는 영화 속의 주인공 서사를 일반 사람들의 삶으로 환원시켜 삶과 죽음의 의미를 확대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각 위대한 서사시를 쓰고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거겠죠.
다섯째, 참으로 삭막한 배경의 역설인데요. 매캐하고 목이 칼칼한 정도로 뿌연 먼지의 도시 속에서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을 만난다는 겁니다. 자살이 삶의 목표였던 바디에게 희망의 빛을 보게 한 것은 노인의 말이었습니다. 그 말속에 신의 숨결이 들어 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은 중요합니다. 따뜻한 말은 더 소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상처 주는 말을 마구 해대며, 소중한 말은 거의 잊고 살고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