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말과 사람의 말

- 가룟 유다의 말을 듣는 시간

by 노란하마

바라보기만 해도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은 소박하고 청빈한 교회입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나 서초동의 사랑의 교회, 역삼동의 충현교회와 비교해보면 거의 쪽방에 가깝죠. 하지만 남루하지 않습니다. 현학적인 교리도 부끄러운 치부도 없습니다. 땡볕 아래 콩밭과 고추밭을 일구며, 외롭고 힘든 삶을 사시는 어르신들이 낮은 목소리로 그분을 찾는 소리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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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작 마을의 교회>


어려움에 처한 한 여인과 한 사내가 있습니다. 여인이 목에 끈을 매고 자살을 시도하던 중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사내는 기도를 하다가 목에 끈을 매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여인과 사내 중 어떤 사람이 더 불경할까요? 구원에 이르기는 할까요? 여인은 극한 상황에서 절실하게 마지막 절규를 부르짖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내는 조금 생경하고 충동적이란 느낌이 듭니다. 사내는 기도가 아니라 애초부터 협박을 한 건지도 모르죠. 원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으면 다 끝장내겠다는 건 도발적인 바터제 신앙입니다. 제 소원을 들어주시면 모든 걸 다 바치겠습니다! 가장 치사한 전형적인 거래라고 할 수 있죠.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믿음이 주고받는 식으로 변한 건 아닐까요? 두 달 내내 목에 끈을 걸고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에게 들려준 하늘의 소리를 나에게도 들려달라고 치기를 부린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런 치기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바터제? 그런 거 없습니다!

제가 그분을 존경하고 따른 이유는 야만의 시대에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영생불멸과 믿음 천국 같은 건 왠지 그럴듯하게 디스플레이된 상품처럼 보입니다. 저한텐 그걸 살 능력도 없지만 사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멋진 장면을 실컷 보고, 좋은 소리를 들었으며, 거기다 맛있는 것까지 배불리 먹었는데 다음 생에서까지 무한 보너스를 챙기겠다는 건 아무래도 저한텐 언감생심입니다. 공포를 통해서 종교의 힘을 유지했던 때가 있었죠. 한데 지금은 백화점식으로 건강, 사업 성공, 승진, 결혼, 대학입시까지 파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건 무당이 하는 거 아닌가요?

가끔 가룟 유다를 떠올려봅니다. 많고 많은 죄인 가운데 왜 유다는 구원받지 못하는 인물로 여기는 걸까요? 유다는 열 두 제자 가운데 머리 회전에 빨라 회계를 맡아봤죠.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아주 인간적이었죠. 은 서른 세겔에 그분을 로마 병사에게 넘겨준 악역을 맡았지만 은 서른 세겔이 목적은 아니었을 겁니다. 유다는 민족주의자였고, 열심당원이었습니다. 지하 저항세력이었던 셈이죠. 그러니까 그는 로마 압제의 군홧발과 채찍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로운 유대를 이루는 게 목표였을 겁니다. 그분께서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보고 가슴이 뛰었겠죠. 저런 힘을 로마 병사에게로 향하면 못 이룰 게 없다고 당연히 기대했겠죠. 그런데 그분은 이 땅의 현실이 아니라 하늘에 시선을 맞추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라뇨. 유다는 실망했고, 쇼크를 받았습니다. 결국은 좋은 머리로 꾀를 부렸죠. 기적을 현실에 쓰지 않을 수 없도록 그분을 궁지로 몰아넣는 계획을 세운 겁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신발을 벗어던지거나 물을 뿌려 불을 꺼야 하는데 그분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계획대로 액션을 취한 게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칼로 상대의 급소를 정확히 찔러 굴복시키려 했던 검객이라면 그분은 아예 칼로 대항하지 않고 마음으로 상대가 찌르면 찌르는 대로 다 받아주고 포용하죠. 유다가 정의를 힘으로 실현하려고 했다면 그분은 사랑으로 포용한 거죠. 힘이 정의가 된다면 사랑은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유다는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모든 건 이미 다 지나간 뒤였습니다. 유다는 그분을 머리로만 이해했지 가슴으로 따른 게 아니었습니다. 이제 유다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었습니다. 유다는 나뭇가지에 끈을 걸고 목을 맸습니다. 유다의 고뇌가 얼마나 무거웠던지 그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 나뭇가지가 부러졌다고 하죠. 신학자들은 유다의 죽음을 극적으로 과장하기도 하는데요. 벼락을 맞았다든지 배가 갈라져 창자가 다 쏟아져 나왔다든지 등등. 수많은 죄인 가운데 유독 유다를 구원받지 못하는 인물로 여기는 건 모든 죄인은 인간을 상대로 죄를 저질렀지만 유다는 인간이 아니라 신을 상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치명적이죠.

그래도 다시 생각해봅니다. 유다의 후회와 자살이 그의 죗값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해도 구원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요. 그게 그분께서 이 땅에 온 이유이고, 그래서 의미가 있으며 우리에게도 축복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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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있는 마을의 아침 풍경>


이른 아침 시원한 바람을 타고 걸으면서 유다를 잠시 떠올려 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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