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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Jul 31. 2021

시가 되기를 꿈꿨던 <버닝>

-  보고 생각하지만 존재까지 다가가기는 어려운 영화

  친절하지 않은 영화를 만나는 건 피곤하고, 신경이 거슬리는 일입니다. 보고 나서 속은 것 같기도 하고, 왠지 농락당한 기분이 들기도 하죠. 때로는 자신의 스크린 해독능력이 수준 이하인 건 아닌가 하는 자의식에 빠지기도 합니다. 영화는 어차피 카메라와 연출의 기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메시지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메시지가 없는 것도 메시지죠. 관객은 거의 다 영화가 끝났을 때 본능적으로 사금을 채취하듯 메시지를 정리하려고 애씁니다. 관객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결국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게 영화의 공식적인 토픽이 되기도 하죠. 물론 지적인 시각과 담론으로 독특한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죠. 모든 독서는 오독이란 말이 있듯이 영화라고 해서 그와 다를 이유 또한 없다고 봅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 대한 해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월러스 스티븐스의 ‘Thirteen Ways of Looking at a Blackbird’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수밖에 없는 이유 수많은 구체적인 서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서사 자체가 은유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선과 액션을 명확하게 보여주지만 인과 논리를 드러내지 않은 채 진행되기 때문에 극적 결말을 하나의 이야기로 요약하는 건 난센스입니다. 보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거죠. 애초부터 감독의 의도가 거기에 있었으니 평론가와 호사가들이 얼씨구 좋구나, 할 만합니다.

  <버닝>을 관통하는 중요한 핵심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에서 그녀가 말하는 건데요.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이게 스토리 라인의 뼈대를 이루고, 이야기의 초점이 거기에 맞춰 진행되죠. 해미가 하는 팬터마임의 ‘귤’은 물론 ‘우물’과 ‘고양이’와 ‘햇빛’ 그리고 ‘비닐하우스’까지도 그 안에 포섭돼 이야기의 긴장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개인의 서사들이 인과 논리에 의해 극적인 절정으로 치닫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파편화된 장면들이 고도의 몰입감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게 신기합니다. 서사적 장면 하나하나가 시에서 말하는 하나의 시어에 대응되는 수많은 관계, 즉 텐션이 느껴니다. 참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어쨌든 <헛간을 태우다>에서 ‘나’와 ‘그녀’와 ‘그’의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버닝>에서는 종수(유아인)와 벤(스티븐 연)과 해미(전종서)의 캐릭터로 진행됩니다. 그 진행되는 서사가 때로는 현실인지 상상인지 혹은 소설의 내용인지 모를 정도로 경계를 넘나들기 때문에 이야기가 모호해지는 건 당연하고, 관객 스스로 그 의미를 추론해야 하는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인 사뮈엘 베케트에게 기자들이 ‘고도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고도는 고도이다’라고 답변했는데 <버닝>의 메타포도 결국 관객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입니다.

  보수적인 관점으로 종수라는 캐릭터를 보면 아픔만 있는 88만 원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를 둘러싼 가정환경도 최악이죠. 아버지는 공무원 폭행죄로 재판 중이고, 가출했다가 16년 만에 나타난 어머니는 사채빚을 갚기 위해  오백만 원이 필요하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이미 공중분해된 가족이죠. 종수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분노는 시한폭탄처럼 숨을 죽이고 있습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종수와 해미의 관계로 진행되는데, 해미의 캐릭터 또한 메타포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카드빚을 지고 있는 내레이터 모델이지만 현실의 중력에서 비껴 나 있는 인물이죠. 해미가 말하는 고양이와 우물은 종수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이지만 그게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인력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해미는 커피를 마시듯 섹스를 하고, 어떤 남자한테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 그런 해미의 성격은 그녀 스스로 드러내는 게 아니라 종수의 시각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해미를 바라보는 종수의 시선으로 타자화 된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러므로 해미가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의 액션을 취하고, 마지막으로 옷을 벗어던지며 춤을 추는 행위는 그녀가 누구에게도 종속된 게 아니라 자율적인 존재로서 자기 해방을 선언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해미가 사라지고 이야기의 진행은 종수와 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종수와 벤은 사회적 계급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캐릭터입니다. 88만 원의 세대와 포르셰를 몰고 다니는 게츠비. 간신히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우는 자와 요리를 하면서 음식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며 자신은 그 음식을 먹는 신이라고 언어유희를 즐기는 자. 비닐하우스를 지키려는 자와 비닐하우스를 태우려는 자. 해미의 행방을 찾는 자와 해미를 망각한 자. 대립적인 인물과 구도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쉽게 해독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닙니다. 묘하게 얽혀있죠.

  해미를 통해서 알게 된 벤은 이미 종수의 의식 깊숙이 파고들었지만 종수의 시선으로 벤을 규정하는 건 해미와 유사합니다. 벤에 대한 집착은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증오와 분노를 일으킵니다. 종수를 분노하게 만드는 건 벤의 집 화장실에서 해미의 시계와 해미의 고양이를 보게 되는 건데요. 그를 통해서 해미가 보이지 않는 건 살해되었기 때문이며, 해미를 살해한 건 벤이라고 판단해버립니다. 일종의 확증편향이죠. 아이러니한 것은 그 이후로 종수가 소설 집필에 몰두한다는 겁니다. 자신의 시선으로 규정한 인물과 사건을 창조하는 거죠. 그런데 중요한 두 장면이 있는데 벤이 메이크업 박스를 앞에 두고 여자한테 화장을 해주는 것과 자신의 눈에 렌즈를 끼우는 겁니다. 이는 벤에 의해서 인물이 만들어지고, 벤의 시선으로 세계가 그려지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거라고 보는데 그러한 벤도 결국은 종수의 소설 작품 속에서 움직이는 허구적인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메타포가 아니라 이중으로 나타나는 거죠.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들이 하나의 사건으로 모아지지 않고, 산문 요약도 되지 않는 건 바로 이러한 메타포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종수가 벤을 죽이고, 포르셰에 불을 지른 뒤 옷을 다 벗어버리는 장면도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행위입니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종수 내적 고민과 서사가 소설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확대됩니다. 무력감으로부터의 탈피, 사회적 계급과 모순에 대한 분노, 자신의 존재에 대한 실존적 자각, 새로운 자아의 정립과 세계로 들어가는 통과의례(initiation) 같은 거죠.      

  불이 훨훨 타는 포르셰를 뒤로 하고, 트럭을 모는 종수의 표정에서 이상의 <날개>의 마지막 장면이 겹쳐졌습니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일상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상호 충돌로 빚어지는 자아분열은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을 뜻합니다. 권태와 모순과 무기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날개>에서의 나와 <버닝>에서의 종수의 몸짓은 존재에의 확인과 행복의 갈망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 비슷하게 다가왔습니다.

  조악한 날들에 진저리 칠 때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처럼 방황하다가 ‘혓바닥을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스스로에게 횡포를 부리던 그 시절이 휙 지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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