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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Aug 17. 2021

영화  <더 파더>를  보고

- 노인이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시간


  <더 파더>는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진행될수록 이야기에 몰입하기 어렵습니다. 공간이 자주 바뀌고, 인물들은 관계는 뒤죽박죽 헷갈리게 등장하며, 거기다 대사까지 불협화음처럼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부조리극인가? 호러물인가? 잠시 영화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떠올려보기도 하죠. 



 사실 <더 파더>의 스토리는 간결합니다. 배경은 영국 런던이고, 연인과 함께 파리로 가서 살게 된 앤(딸 : 올리비아 콜맨)은 치매에 걸린 안소니(아버지 : 안소니 홉킨스)를 간병인에게 케어를 맡깁니다. 하지만 여러 명의 간병인과 잦은 마찰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앤은 안소니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고 파리로 떠나는 게 스토리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간결한 스토리 라인이 복잡하게 느껴지는 건 이야기의 진행이 치매 환자인 안소니의 시선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치매환자를 설득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정상인이 치매환자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는 일도 그 못지않게 어려울 수밖에 없죠. 아니 애초부터 소통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영화가 한참 진행될 때까지도 집이 왜 바뀐 거지? 딸과 사위는 왜 바뀐 거야? 하는 의문이 생기면 그건 정상적인 사고와 인지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안소니의 말과 행동은 자신의 왜곡된 기억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정상적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 

  치매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 치매로 인한 가족관계의 파탄 혹은 가족의 눈물 나는 희생에 초점을 맞춰 신파극이 되는 게 보통입니다. <더 파더>가 인생영화로 손색이 없는 건 상투적인 수법으로 최루성 눈물을 짜내는 게 아니라 주인공 안소니가 무너져가는 정신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품위를 지키려는 숭고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영화에 대한 단상 몇 가지를 정리해 봅니다. 

  안소니가 끊임없이 집착하는 건 집과 시계입니다. 집은 생존의 터전이면서  모든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공간이고, 시계는 삶의 시간이기 때문이겠죠. 죽은 자한테는 추억도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안소니가 보여주는 건 집착이라기보다 거의 살아있는 사람의 본능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공간은 주로 어둡고 폐쇄적인 집안입니다. 다분히 연극적인 분위기지만 공간과 인물이 뒤바뀌는 장면을 통해 안소니가 놓여있는 현재의 아노미적 정신 상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건 고도의 영화적 연출입니다. 안소니가 치매환자라는 것도 몇몇 장면을 통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데요. 저녁 시간을 아침시간으로 혼동하고, 금방 먹고 난 치킨을 다시 찾는 건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앤이 장을 보고 온 비닐봉지를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 넣는 것도 일반인들은 하지 않는 행동이죠. 사라이 박사한테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 앤이 문 앞에서 노크를 하자 밑도 끝도 없이 앤에게 열쇠를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말합니다. 병원을 아파트로 착각한 거죠. 간병인 로라(이모겐 푸츠 : 피어스 브로스넌과 토니 콜렛과 함께 A long way down에서 남자 친구와 이별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는 당돌한 역할을 했던 게 인상에 남음)가 약을 주었을 때 약은 그냥 손에 들고 있고 물만 마시는 것도 치매가 진행되고 있는 걸 재치 있게 표현했죠.

  앤이 컵을 씻어 싱크대에 올려놓다가 바닥에 떨어뜨려 깨뜨리는 장면과 침대에 누워있는 안소니의 얼굴을 쓰다듬다가 손으로 목을 조이는 상상은 그녀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걸 아는지 방안에서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안소니를 도와주자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앤에게 “모든 게 다 고맙다.”는 말을 따뜻하게 건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집안에서 안소니와 앤이 창밖을 보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안소니는 소년이 봉지를 가지고 노는 장면을 보고 미소를 띠지만 앤은 옆집의 연인이 포옹하는 걸 부러운 듯 바라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두 사람의 마음 상태나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 시선이 닿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안소니가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던 중 CD가 튀는 것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기억의 왜곡 현상을 보여준 거라고 느꼈습니다. 특히 물줄기가 콸콸 쏟아져 나오던 수도를 잠갔을 때 거기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다가 아예 나오지 않는 장면은 소멸되어가는 시간과 기억을 상징하는 거란 느낌이 확 와닿았습니다. 

  딸인 앤도, 간병인 로라도, 요양병원의 간호사 캐서린도 안소니에게 공통적으로 말하는 약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게 안소니와 소통하는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케어해주는 자와 보살핌을 받는 자의 서글픈 인간관계가 되는 거죠. 그래서인지 안소니가 간병인으로 온 로라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탭 댄스를 보여주는 것과 사위에게 말하면 안 될 앤의 이혼 경력을 말하고 나서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oops!’하는 장면은 더 쓴웃음을 짓게 합니다.    

  집안이 계속 바뀌고, 딸과 사위의 인물도 헷갈리게 바뀌면서 카메라의 초점이 요양병원의 병실에 맞춰집니다.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병실을 클라이맥스 정점으로 삼기 위해 여러 시퀀스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요양병원의 병실에서 꾹꾹 눌려있던 감정이 모두 폭발하고 맙니다. 

  안소니가 요양병원 간호사 캐서린에게 묻죠. 

  “나는 뭐지? 난 정확하게 누구야?”   

  “어르신요?”

  “아, 안소니, 안소니, 안소니. 어머니가 지어주셨을 거야. 어머니가 보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간신히 지탱해왔던 정신이 와르르 무너져 내립니다. 안소니가 울기 시작하죠. 그리고 서글프게 말합니다. 

  “내 낙엽이 다 떨어진 거 같아.”

  “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난 더 이상 머리를 뉘일 곳이 없어.”

  캐서린이 어린아이처럼 우는 안소니의 어깨를 보듬고 다독여줍니다.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두 사람한테 초점을 맞추었던 카메라가 팬 하면서 창밖의 푸른 나무들을 보여줍니다. 그게 라스트 씬입니다. 더 이상은 안소니의 시간과 인생이 아닌 푸른 나무들. 푸른 나무들의 이파리는 무성하지만 안소니의 것도 아니고 손도 닿지 않기에 혼자만의 인생으로 남고 맙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암울한 치매 이야기를 뛰어넘어 고도의 인간 심리를 보여준 건 섬세한 연출과 안소니 홉킨스의 흡인력 있는 연기 때문이었습니다. 작은 이야기로 큰 감동을 주고, 인생영화가 된 것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또한 우울한 영화로 끝나지 않고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던 건 캐서린이 안소니를 다독여주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자와 간병인의 관계가 아이와 어머니로 환원되어 자연스럽게 감동을 자아냅니다. 또한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숭고한 몸짓과 푸른 나무의 영상미에 담긴 철학적 메시지가 상투적인 신파극과는 질감이 다른 인생을 보여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족 - 배경음악으로 나온 오페라 <진주조개잡이>의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이 왜 그렇게 서글프게 들렸을까요. 나만 그런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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