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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Aug 27. 2021

단편영화 <SIGNS>

- 어느 날 갑자기 사무실로 배달된 사랑의 사인

  


  외로운 솔로 제이슨. 정해진 시간에 로봇처럼 일어나 혼밥 하고, 지하철 타고 출근하고, 가끔은 여자한테 눈길을 슬쩍 주고, 데이트하는 연인을 부럽게 쳐다보고, 일하고, 회의하고, 퇴근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이면 일어나 어제와 똑같은 삶을 반복합니다. 눈에 초점도 희미하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고, 사는 게 아니라 간신히 쳇바퀴 같은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 중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쏟아내는 도시의 행복한 소음들 속에서 제이슨만 혼자 무인도에 있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너편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직원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제이슨은 노골적으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힐끗힐끗 곁눈질을 합니다. 건너편 사무실의 여직원이 그걸 눈치챕니다. 여직원은 곧바로 종이에 매직으로 ‘TAKE A PHOTO’라고 써서 공격하죠. 제이슨이 당황하자 이내 ‘I M KIDDING’이라고 종이에 써 보이며 해맑게 웃어줍니다. 제이슨도 어색하게 따라 웃습니다. 여직원이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보여줍니다. ‘STACEY’. 제이슨도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종이에 써서 들어 보이죠. 그리고 서로 ‘NICE 2 MEET U’를 써서 인사를 나누죠. 



  그다음 날부터 제이슨의 삶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회사로 출근하는 발걸음에 활력이 넘칩니다. 그녀를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출근하자마자 스테이시로부터 사인이 옵니다. 제이슨은 그 사인을 받느라 회의 중에 실수도 하죠. 그녀와 주고받는 글이 적힌 종이를 집으로 가져와 냉장고에 붙여두기 시작합니다. 이내 붙일 공간이 없을 정도로 가득 찹니다. 그리고 스테이시한테 점점 빠져듭니다. 



  회사로 출근하는 게 이젠 신이 나고, 에너지가 펄펄 넘칩니다. 사무실에서 뜻하지 않게 큐피드의 화살을 정확히 맞은 거죠. 스테이시가 ‘I HAVR A SECRET’ ‘I WAS WATCHING U FIRST’라고 쓴 종이를 들어서 보입니다. 제이슨은 종이에 허겁지겁 ‘DO YOU WAN’T TO MEET?’라고 씁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죠. 보일까 말까? 들을까 말까?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스테이시는 다른 직원과 이야기를 나눈 뒤 자리를 비웁니다. 결국 제이슨은 종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제이슨은 혼자 거울 앞에서 ‘DO YOU WAN’T TO MEET?’라고 쓴 종이를 여러 액션을 취해가며 연습을 합니다. 부드럽게 혹은 박력 있게, 때로는 자연스럽게. 어쨌든 멋지게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다음 날이 밝자마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출근을 합니다. 도식적이고, 상투적인 연출이 여지없이 발휘됩니다. 에스컬레이터를 몇 계단씩 건너뛰고,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내려서 계단으로 뛰어올라가는 것 등등. 허겁지겁 사무실로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앉자마자 종이를 꺼내 펼쳐서 건너편 사무실의 스테이시한테 보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스테이시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새로 들어온 남자 직원이 스테이시의 자리에 앉습니다. 스테이시가 없어진 겁니다. 제이슨은 ‘DO YOU WAN’T TO MEET?’라고 쓴 종이를 든 채로 한참 멍하니 있습니다. 아득히 추락하는 눈빛이 역력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면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죠.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이슨은 퇴근해 집에 가서는 ‘DO YOU WAN’T TO MEET?’라고 쓴 종이를 원망하듯이 들여다봅니다. 타이밍을 놓친 게 후회되겠죠. 왜 미리 먼저 보이지 못했을까. 자책을 하는 표정이 안타깝습니다. 다시 모든 게 스테이시를 만나기 전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맥이 빠진 출근과 퇴근. 어깨가 축 처지고 초점을 잃은 눈. 제이슨의 사무실에서 다시 무인도에 갇힌 몸이 됩니다. 그렇게 의기소침하고 있을 때 누군가 장난을 하듯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켜 제이슨 얼굴에 비춥니다. 눈이 부십니다. 눈을 찡그리며 거울로 자신을 비추는 쪽을 쳐다봅니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이는 바로 스테이시였습니다. 먼저 있던 사무실에서 한층 더 위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았던 겁니다. 그녀는 곧바로 종이에 펼쳐 보입니다. ‘I GOT PROMOTED’ 승진한 거죠. 제이슨은 축하한다고 보내고 나서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DO YOU WAN’T TO MEET?’라고 쓴 종이를 보여줍니다. 스테이시한테 바로 답장이 옵니다. 제이슨을 스테이시를 만나기 위해 사무실을 뛰쳐나가죠. 제이슨과 스테이시는 횡단보도에서 파란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서로를 바라봅니다. 솟구치는 흥분과 열망을 지그시 누르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갑니다. 오래 기다렸다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만남이고, 그래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만남입니다. 제이슨은 스테이시한테 다가가 입을 열고 인사를 하려는데 그녀가 손가락을 쉿! 하면서 하트 그림 안에 ‘HI’라고 쓴 종이를 내보입니다. 그리고 따뜻한 눈빛으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봅니다.     


 

  <SIGNS>은 <킬러의 보디 가드 1,2>와 <익스펜더블 3>를 연출한 호주 출신의 패트릭 휴즈 감독의 단편영화입니다. 12분짜리 단편영화이지만 감동의 울림이 적지 않습니다. 2009년 Cannes Lions서 수상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특히 <SIGNS>는 작중 인물의 간의 대사가 한마디도 없이 오직 종이에 쓴 글씨로만 의사소통을 하는 게 매력입니다. 소리 나는 대사가 없기 때문에 두 인물의 감정이 오롯이 표정에 묻어납니다. 외국영화의 경우 대사가 많으면 자막을 읽느라 배우의 표정이나 장면을 놓치기 쉽죠. 뿐만 아니라 말은 그 뜻과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증발해버리기까지 합니다. 거기다 말이 너무 많으면 소음이 되고 말죠. <SIGNS>은 음악으로 도시의 모습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무엇보다 음악이 인물들의 표정과 심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집니다. 한 장면 한 장면, 모든 게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압축과 요약, 그리고 반전으로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의 리얼한 로맨스 판타지를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리얼하다는 건 핍진성이 아니라 관객들이 감득하는 정도가 높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도시생활에서 5년 내내 지하철을 타거나 쇼핑몰을 다녀도 인연을 만나는 건 어렵습니다. 대학 4년을 다녀도, 직장생활 6년 차임에도 연인을 사귀는 게 쉽지 않다는 점에서 <SIGNS>는 판타지 로맨스에 가깝지만 앞서 말한 감득되는 정도가 높기 때문에 리얼하다고 한 것입니다. 스테이시를 만나고 난 뒤 제이슨의 행동과 심리의 변화가 자연스러워 관객은 스토리에 몰입하면서 동시에 작중 캐릭터와 함께 호흡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YouTube에 들어가셔서 SIGNS이라고 치고, 10분쯤 시간을 내어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의 판타지 로맨스를 즐길 수 있습니다.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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