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란하마 Aug 31. 2021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우주에서 가장 빛나는 별은 인간이다

 


  김 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색다른 감동과 재미를 안겨준 소설입니다. 작품을 읽는 내내 행간에서 문득문득 영상으로 떠오르는 우주적인 장면들은 나의 상상력에서 인화된 게 아니라 이미 수없이 보아온 할리우드 영화에서 기인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스타트렉> <제5원소> <스타워즈> <미션 투 마스> <마션> <인터스텔라> <프로메테우스> <패신저스> <콘택트> <컨택트-Arrival> <발레리안 : 천 개 행성의 도시> <블레이드 러너 2049> <애드 아스트라> <오블리비언> 등등. 기억 속에 이미지로 저장된 장면들이 독서 행위를 통해 소환되어 작가가 묘사한 문장과 장면에 나름대로 덧대기도 하고, 때로는 유쾌한 의도적 오류(Intentional Fallacy)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김 초엽의 소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앞에서 언급했던 영화들이 주지 못한 감동과 페이소스가 있습니다. 그 감동과 페이소스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그것을 간과한 채 SF 소설 범주에 넣어 단순화시키는 건 소재주의로 국한하는 야만적 독서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의 기본 원리는 인물과 사건을 관계 짓는 것입니다. 관계를 짓는다는 건 곧 구성을 뜻하죠. 극적인 흥미를 유발하고,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구성이 치밀한 소설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을 만들어 미묘한 심리는 물론 생의 이면까지 들여다보게 합니다. 스토리의 감득이 되는 것도 구성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점에서 김 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소설을 엮어나가는 구성이 조금은 성기고 단선적이며, 거기다 건조한 문체까지 더하니까 얼핏 맹맹한 느낌마저 듭니다. 하지만 다시 곰곰이 따져보면 성기고 단선적인 구성이라기보다 여백이 있는 단일한 구성에 가깝고, 문체는 미래 사회에 맞게 편의적으로 단순화시킨 기호 체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 중심에 사람이 있습니다. 페이소스와 감동을 우려내는 에너지의 원천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유토피아는 존재하는가? 우리가 사는 지구가 과연 유토피아인가? 배아 기술로 인간을 완전체로 만든다면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현재의 지구는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미래에도 그런 유사한 문제들은 끊임없이 생기겠죠. 수많은 문제들로 인해 때로는 우리가 지켜온 삶의 방식을 부정하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의 존재까지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결단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건 어떤 희망도 없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괴롭다고 해도 그 괴로움 이상의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또한 우리가 지구적인 삶을 지켜내야 할 이유이고, 살아갈 희망이라고 할 수 있죠. 더구나 여기 지구에 사는 인간한테는 무엇보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결코 문명의 사막으로 전락하지는 않을 겁니다. 문명이 아무리 첨단으로 간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곳은 디스토피아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례자들이 지구를 떠나지 않는 이유도 그 사랑 때문이 아닐까요?


  ‘스팩트럼’은 우리가 외계인과 조우했을 때 어떤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할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컨택트-Arrival>에서 드니 빌뇌브 감독은 독특한 사인과 신호로 외계인과 의사소통하는 걸 보여줬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을 하는 건 청각 체계인 음성과 시각체계인 문자입니다. 그밖에 깃발이나 그림, 몸짓 같은 게 사용되긴 하지만 주된 기호체계는 음성과 문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공 희진은 외계인 행성에서 루이와 만나게 되고, 그의 보호도 받게 되죠. 외계인 루이는 주로 색채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에 희진과 의사소통은 되지 않습니다. 희진이 외계인 행성에서 구조가 된 후 할머니가 될 때까지 루이가 남긴 기록을 해독하기 위해 색채 언어 해석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록물 중에서 가슴을 울리는 감동적인 한 문장을 찾아냅니다.

  “그는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이다.”

  외계인 루이와 희진은 기호체계가 아닐지라도 이미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거죠. 언어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만든 편의적이고 효율적인 기호체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기호체계보다 깊은 기저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과 외계인의 묵시적인 감정 교류가 압축되어 있는 문장은 시에 가깝습니다. 희진의 모든 삶과 그런 희진을 바라보았던 루이의 감정이 그 한 문장에 담겨 있습니다. 색채 기호로 쓴 그 문장의 색깔은 어땠을까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으면서 역으로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게 과학기술이 추구하는 최종 목표일까요? 빛의 속도로 갈 수 있다면 인간이 우주를 소유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가슴 먹먹해지는 감동을 주는 건  초광속 항법과 냉동 수면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백일흔 살이 되도록 슬렌포니아 행성으로 가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안나의 삶입니다. 그녀가 슬렌포니아로 가려는 건 그곳에 자원이 풍부하고, 살기 좋은 행성이라서가 아니라 남편과 아들, 즉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어.’

  가족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초월해도 결코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운명이죠. 그리고 사랑입니다. 가족해체보다 더 슬픈 건 망각으로 잊힌 가족입니다. 잊힌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룬 가족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그리고 지켜내야 할 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우주영웅에 관하여’는 충분히 예상되는 반전이었음에도 아주 매력적인 소설입니다. 온갖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고,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동양 여성인 재경이 신체개조 프로젝트의 험난한 과정을 다 끝내고 우주가 아니라 심해로 뛰어든 도발적인 행위가 갖는 의미가 각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동양인, 비혼모, 만성 전정기관 이상과 표준 신체에 미달하는 근육과 뼈의 밀도 같은 악조건과 차별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우주인의 서사를 만들 준비가 모두 끝났지만 재경은 우주로의 비행이 아니라 스스로 심해로 뛰어들어 유영을 하게 됩니다. 이는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우주인 프로젝트에 투입된 엄청난 비용에 대한 회수 불가능의 소모적 낭비이고, 그야말로 먹튀로 다른 사람의 잠재적 기회마저 빼앗아버린 결과가 됐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의 핵심은 효율성에 있습니다. 효율성은 경제적 부가가치로 나타나고, 더불어서 사람들의 삶이 풍성하고 윤택해지기도 하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과학기술은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상품화하기도 합니다. 과학기술이 갖는 자기 파괴적 모순이기도 하죠.

  재경이 심해에 뛰어든 건 소수자로서 받았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일거에 날려버린 행동이지만 그게 전부였을까요? 우리는 정해진 규범과 제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탈행위에 대해서 물리적 제재가 가해지기도 하죠. 규범과 제도가 지켜내는 질서와 그 질서 속에서 개인이 추구하는 행복은 다른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괴물로 살아갈 때, 자연인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걸 최고의 명제로 삼을 때, 덜 먹고 덜 자고 덜 싸는 사람이 어디엔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유유자적한 삶에서 행복을 일궈내고, 의미를 찾는다면 그걸 비난할 이유는 없어야겠죠. 또 부자도 감히 행복하다고 말하지 못할진대 왜 모든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야 하는지요. 더구나 유클리드 기하학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모순과 한계가 교정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면 비정상인의 행위로 정상인들의 매너리즘과 문제를 드러내 보이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경제적 가치에 함몰된 과학기술,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일방적인 가치평가, 매스 미디어의 조작된 기사를 뒤엎는 재경의 삶은 결국은 왜곡된 궤도를 바로 잡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재경은 조카인 가윤이 우주인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도록 근거를 만들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적 인물은 지금 현재에도 있어야 하고, 앞으로 있어야 하며, 또한 의미도 그만큼 있을 것입니다.  


    

  사족 – 우주의 지적 생명체에 대한 기준이 지독히 인간 중심적인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그건 편견이니까요. 더불어 인간이 우주의 어떤 행성에 다가간다면 그게 지구인 입장에서 신개척이 되겠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침범이 되는 게 아닐까요. 마치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이 원주민에 대한 약탈의 역사가 되듯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매력은 사람 중심의 이야기라는 점과 고도의 유머와 재치도 한몫합니다. 과학기술에 대한 지적 편력은 그냥 배경일 따름입니다. 유머는 고급스럽습니다. 옆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정도로 혼자 낄낄거렸습니다. 우주 어디에서도 통할 유머, 읽다보면 거미줄처럼 몇 군데서 착 걸리게 됩니다. ㅋㅋㅋ                 

작가의 이전글 단편영화 <SIGN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