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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Sep 24. 2021

가을이 있는 풍경

- 그래도 살아야 할 날들

  추석이 태풍처럼 지나갔습니다. 통장의 잔고는 바닥이고, 신용카드는 한도 초과가 된 지 이미 오래됐습니다. 부모님한테 용돈을 많이 드리지도 못했고, 친구한테 선물도 못했는데 왜 이렇게 펑크가 났을까요? 그렇다고 예술의 전당 공연은커녕 CGV 영화관조차 가지 못했는데 그 돈은 다 어디로 샌 걸까요? 사면이 온통 벽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갑갑합니다.

  출구 없음!

  컵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고 나서 창가에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앞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가 아니라 앞으로 살 수 있을까를 물어봅니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요? 결석 한번 하지 않고 다녔던 중고등학교도 성공의 거름이 되는 거랑은 거리가 먼 모양입니다. 인 서울 대학을 하지 못한 게 원인일까요? 아니,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쓰지 못해 올킬을 당한 걸까요? 힘겹게 취직했던 그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둔 게 패착이었던 걸까요?

  거긴 지옥이었어요. 씨발, 죽어도 그렇게는 못 살죠.

  그래도 다소 감정적인 판단이었기에 조금은 후회가 되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확신 없는 날들이 달력 넘어가듯 휙휙 지나갑니다. 바람 부는 대로 살다가 어쩌다 만난 사람과 햄버거 먹듯이 아주 건조한 섹스를 하기도 합니다. 침대에서 진실을 찾는 건 아니지만 사람에게서마저 더 이상 기대할 게 없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면 내가 나 자신을 사막에 팽개쳐버린 느낌마저 듭니다.      

  지나온 날들, 지금 현재, 알 수 없는 미래까지 모두 믹서기에 넣어 갈아버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뭐가 될까요? 가끔 믿을 구석이라고는 토요일마다 돌아오는 로또 추첨 시간. 매주 누군가 일등 당첨이 되는 거라면 그게 바로 나 자신이어도 나쁠 게 없지 않은가 싶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하는 현실로 다가옵니다.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우연에서 어떤 계시의 흔적을 찾으려 하지만 기적은 남의 이야기뿐. 외할머니께서 어릴 적부터 다리를 떨면 복이 달아난다고 했는데 그래서일까요? 다리를 떠는 것과 복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구글을 검색해볼까 싶었지만 그건 내 삶의 밑바닥을 보는 거란 생각이 들어 그만뒀습니다.

  요즘은 편의점에서 1+1 상품에 자주 시선이 갑니다. 내 인생도 누구한테 묶여서 그냥 소리 없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요? 먹고살려면 움직여야 하는데 다 귀찮습니다. 게임도 야동도 재미없네요. 저 놈의 공과금 고지서가 자꾸 신경을 거슬리게 합니다. 몰라, 마음대로 해. 단수를 하든, 단전을 하든. 아무래도 간이 부은 것 같습니다. 한번 부은 간은 평생 간다는데 간이 부은 채로 살아갈 팔자인 모양입니다.     

  갑자기 창밖에서 트럭 장사꾼의 스피커 소리가 들립니다.

  계란을 사세요, 계란이 왔습니다!

  짜증이 나네요. 추석 다 지나갔는데 뭔 달걀? 욕을 해줄까 싶어 창문을 열었습니다. 쩝! 저 아저씨, 나를 미치게 합니다. 돌아버리겠네요. 팔 한쪽이 없네요. 외팔이 아저씬데 이순신 장군처럼 씩씩합니다. 아줌마 서너 명이 몰려듭니다. 외팔이 아저씨는 신났고, 나는 쓸쓸합니다. 그런데 슬픔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밝은 시간입니다. 적당한 표정으로 슬픔의 감정을 대체하려 하지만 그 슬픔의 근원은 또 무엇인가요. 생략해버리고 싶은 오후이지만 그게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담배 한 대 피워야겠습니다. 없네요. 책상 서랍을 뒤졌는데 봄에 사서 먹다 남은 비타민제가 눈에 띕니다. 이거라도 먹어볼까. 두 알을 삼킵니다. 아랫배가 든든해집니다. 갑자기 볼록 알통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저 외팔이 아저씨의 에너지를 반쯤만 훔쳐볼까 싶었는데 사라졌네요. A4용지로 종이비행기를 접어서 창문에서 날렸습니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마스터베이션을 하기에는 가을볕이 너무 밝습니다. 가을날의 오후를 실을 종이비행기가 가볍게 멀리까지 비행하는 걸 바라봅니다.

  정말 잘 날아가네요. 내 인생도 한 번쯤 날아볼 때가 있으려나. 있을 테지. 3억 분이 1의 경쟁률을 뚫고 태어난 인생인데 아무렴.  

  빈 지갑에 희망으로만 간신히 하루하루 연명하는 세상은 분명 비정상이지만 희망이 없는 세상은 더 잔인합니다. 그리하여 비상구 표지판처럼 작은 바람 하나 가슴에 새겨봅니다.

  다시 알바라도 찾아보자. 뭐가 됐든 나 자신을 잃어버리진 말자. 중력이 없다면 그건 이미 죽은 거잖아.

  사는 건 리얼이고, 세상에 자신의 인생만큼 리얼한 게 또 어디 있는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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