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화관에 가려면 제가 사는 마을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까지 나와 시외버스를 타고 춘천으로 가서 거기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CGV로 이동해야 합니다. 엊그제 영화를 보러 가는 날, 아침에 일진이 좋지 않은 건지 마당에 있던 물건을 들다가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는 바람에 팬티가 쫙 찢어졌습니다. 그렇게 오래 입은 것도 아닌데 바느질이 불량하거나 재질이 나쁘거나 한 거겠죠. 아니면 요즘 운동을 많이 해서 엉덩이 근육에 에너지가 넘치거나. 공교롭게 양구에는 일주일 내내 가을비가 오는 바람에 빨래를 하지 못해 갈아입을 팬티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시장이나 편의점에 가서 새것으로 사서 입기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시간도 없고요. 대략 난감이었습니다. 용단을 내렸습니다. 신경이 씌었지만 찢어진 팬티를 그냥 입은 채 제임스 본드를 만나러 가기로요.
어쨌든 여러 가지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no time to die>를 보러 갔습니다. 소풍 가는 날처럼 기대를 안고서 말입니다. 영화 상영시간에 맞춰 춘천 CGV에 도착해서 IMAX관에 입장했는데 관객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나 혼자였습니다. 영화가 시작 될 때 다른 한 분이 들어오더군요. 결국 대궐 같은 IMAX관에서 관객 두 사람만이 제임스 본드를 만났습니다.
하이, 제임스 본드!
영화가 시작되자 금방 몰입이 됐습니다. 한스 짐머가 잘 빚어낸 사운드와 잘 어우러지는 프롤로그 씬, 다니엘 크레이그와 레아 세이두의 사랑이 넘치는 눈빛과 표정, 이탈리아의 소도시 마테라의 고풍스러운 풍경에 시선이 녹아들었습니다.
007 시리즈가 거의 다 그렇듯 상상을 뛰어넘는 오프닝 액션 씬은 순식간에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빨아들이죠. 그런데 <no time to die>은 조금 달랐습니다. 앤티크 가구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호텔 객실에서의 아늑한 러브 씬, 그리고 곧바로 숨 가쁘게 액션 시퀀스가 이어집니다. 다리 위에서의 와이어 액션과 Aston Matin DB5의 카 액션. 내 전신에서 엔도르핀이 솟구치는 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no time to die>의 액션과 어우러진 극적 긴장감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제임스 본드 영화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너무 억눌린 것이었을까요? 마들렌으로부터 계산된 극적 설정과 무엇보다 배우 다니엘 크레이그가 장렬한 엔딩의 멋진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구도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색하게 꿰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임스 본드가 사랑하는 마들렌을 기차로 떠나보내고, 5년 뒤에 만나는 설정이 미스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5년이라는 기간은 한 개인에게 엄청나게 많은 서사가 일어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no time to die>에서의 5년은 딱 하나만을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제임스 본드와 마들렌 사이에서 난 딸을 만들기 위한 물리적인 시간. 그리고 거기다 악당 사핀의 탄생. 그런 시퀀스들이 이야기 전체와 유기적으로 어울려 극적 긴장감을 별로 자아내지 못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은 성긴 구성과 어설픈 스토리 라인이 되고 만 원인이 거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할지라도 빈약한 스토리로 감동의 시네마를 연출하는 건 애초부터 어불성설입니다. 좋은 시나리오에 나쁜 연출이라는 말은 가능해도 나쁜 시나리오에 좋은 연출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헤라클레스 프로젝트. DNA 나노봇으로 인류를 대량 학살하는 계획. 정말 상상만 해도 오싹해집니다. 나노봇을 체내에 한번 주입하면 영구적으로 남아 있고, 이에 접촉하는 사람도 죽는다는 섬뜩한 과학적 상상. 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어쨌든 인류의 대재앙을 몰고 온 최악의 빌런인 사핀의 등장이 조금 생뚱맞았습니다. 사핀이 등장에 공감이 되지 못한 건 그가 악당으로서의 출생 과정이 밋밋했고, 악마로서의 매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핀과 마들렌의 과거 악연이 현재의 제임스 본드와 마들렌을 끌어들이기에는 소구력이 미약하게 느껴졌습니다. 거기다 사핀은 왜 나노봇의 유전자 대량 살인무기를 만드는지 그 이유에 공감하기 어려웠고, 헤라클레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오브루체프 박사의 캐릭터도 종이 인형 같았습니다. 악당이 멋진 캐릭터이어야 상대하는 주역이 더 빛나는 법입니다. 정교의 교리가 아무리 그럴 듯해도 사교의 교리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건 사교의 교리에도 마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당도 그런 인물이어야죠.
영화를 보는 내내 문득문득 라미 말렉의 사핀은 <스카이폴>에서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실바와 <스펙터>의 크리스토퍼 왈츠가 연기한 한스라는 인물과 대비되었습니다. 동시에 샘 멘데스가 <no time to die>를 연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샘 멘데스라면 달랐을 겁니다. 분명히.
액션과 로맨스의 서로 다른 장르를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결합하는 건 어려운 작업입니다. 물과 기름을 섞는 일만큼 쉽지 않죠. 하지만 음악에서도 크로스오버가 있듯이 영화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007 카지노 로얄>에서 에바 그린이 열연했던 베스퍼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베스퍼의 캐릭터가 극적 정당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스토리가 탄탄하면 장르를 초월해 감동을 줍니다.
결국 <no time to die>는 다니엘 크레이그를 장렬하게 산화시키기 위한 접대용 영화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거기다 펠릭스 라이터 역을 맡았던 제프리 라이트도 숟가락을 얹었고요.
오마주는 어떤 감독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작품 속에 특정 장면을 그대로 삽입하거나 유사한 분위기를 차용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극적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저 한 장면을 차용하는 건 소모적인 씬에 지나지 않습니다. <no time to die> 곳곳에서 느껴지는 과거 007 시리즈의 오마주도 단순한 가십거리에 머물고 만 것도 그 때문이겠죠.
어쨌든 <no time to die>는 감성적인 007 액션 로맨스라는 장르가 됐습니다. 다이내믹한 액션과 사랑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로맨스는 어딘지 모르게 회를 맛있게 먹고 났는데 후식으로 청국장이 나온 것 같은 그런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물론 <no time to die>에서 흑인 여자 배우 라샤나 린치가 007 노미 역을 맡은 것과 CIA 요원 팔로마 역을 맡은 아나 드 아르미스가 눈길은 끌었습니다. 거기다 빌리 아일리시가 주제곡 ‘no time to die’를 몽환적으로 부르는 게 딱 취향 저격이고요. 하지만 그것이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강력한 요소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적지 않은 관객들이 <no time to die>의 일본풍 분위기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게 현실이기도 하죠. 사핀이 대량학살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섬의 연구소가 일본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 그 연구소의 정원이 인위적으로 잘 꾸민 일본풍이라는 것. 거기다 욱일기가 디자인된 앞치마를 요원 Q가 입고 있다는 것. 사핀 앞에서 제임스 본드가 바닥에 머리를 대고 엎드린 게 일본의 ‘도게자’ 자세라는 것도 지적합니다. 사핀이 얼굴에 쓴 가면부터가 가부키 특유의 화장 분위기와 흡사합니다.
그런 것들은 일본인 유전자를 가진 캐리 조지 후쿠나가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게 정신 문화사적으로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참 애를 쓰고 있다는 느낌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일본을 끼워 넣고 싶었으면 앞치마에 욱일기 디자인을 넣었을까요. ‘도게자’의 자세를 취했다가 총을 꺼내 쏘는 것도 결국은 ‘도게자’도 속마음을 감추는 간교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일본인의 정서를 그야말로 실수로 드러내 보인 게 아닌가 싶었고요. 가면의 가부키 화장 분위기도 단순히 소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이 스토리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데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오히려 복면을 한 사핀의 요원들이 로프를 타고 오브루체프 박사 연구실로 침입할 때 멀리 보이는 건물이 롯데월드타워를 이미지화 한 것 같았고, 강물도 한강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역시 서울은 멋진 도시군.
춘천 CGV IMAX관에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 혼자 앉아 아쉬운 마음은 한편에 접어두고 속으로 작별인사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