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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Oct 20. 2021

하드보일드 한 스토리와 시골생활

- 비와 바람과 서릿발 추위의 기습

  영서 지방은 며칠 내내 비가 쏟아졌습니다. 바람은 또 어찌나 드세던지요. 거기다 영하권의 찬 공기가 몽고 기마병처럼 일시에 휘몰아쳤습니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불시에 기습을 당하는 건 인생이나 날씨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둠을 가로지르는 바람소리와 빗소리를 귀에 담아내어 천천히 문장으로 바꾸어갑니다. 미움과 서러움, 부끄러움과 울분,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문장들이 난장처럼 펼쳐지다가 끝내는 가늘고 긴 한숨으로 쉼표를 찍은 뒤 호흡을 가다듬어 봅니다. 

  -이런 기습은 반칙 아닌가요?

  간밤에 비바람이 얼마나 세차게 불었는지 개복숭아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채 수확하지 못한 들판의 벼는 몰살당한 듯 바닥에 쓰러져 있습니다. 강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슬픈 자국들이 꾹꾹 찍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죠. 불시에 헤어지고 난 뒤에도 지워지지 않는 추억과 아픔이 오랫동안 남아 있는 거요.  

  오랜만에 햇살이 비친 가을 들녘은 혼자 보기 참 황송합니다. 마음을 비우면 가을의 풍경은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여전히 싱그러운 쑥부쟁이 한 다발. 

  고소한 내를 풍기는 들깨 다발. 

  단맛으로 쪼그라진 대추알.

  까치밥으로 남겨 둔 사과.



  거기다 냇물 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배터리를 새로 교환한 것처럼 청아하게 들립니다.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욕심 부스러기까지 전부 쓸려가는 느낌입니다. 시골에서 살다 보면 욕심을 덜어내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성찰의 시간과 공간으로 가득합니다. 생태주의란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식탁 위에 오르는 밥상이고, 마시는 물과 같습니다. 몸 안의 피가 말라가고, 육신이 대지에 가까이 다가가는 게 삶의 과정입니다. 핏방울이 서서히 한 방울 한 방울 보이지 않게 사라지고, 몸은 중력을 따라 땅으로 기울어집니다. 어떤 이는 핏방울을 한 번에 다 쏟아버리고 고꾸라져서 땅속으로 들어가기도 하죠. 



  가을 들판은 성찰의 공간입니다. 풍성한 결실을 한 톨도 남김없이 다 건네주고 난 뒤 빈 가슴으로 침잠에 빠져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등뼈 마디 하나가 쑥 빠져나간 것 같은 황량한 들판에서 잠시 허수아비처럼 서서 가을 햇살을 맞으며 멍 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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